새 소식

제목<금강반야경 문수반야경> 신간 안내
작성자관리자조회수1097날짜2017/04/04
첨부파일 diamondsutra.jpg

diamondsutra

제목: 금강반야경 문수반야경
김태완 역주 | 신국판(152×225) | 371쪽 | 양장 | 값 18,500원 | ISBN 978-89-89590-64-4 03220 | 2017년 3월 28일 발행 | 침묵의 향기(T.031-905-9425)

깨달음과 해탈의 지혜를 밝히는 최고의 경전

   금강반야경(금강경)과 문수반야경은 깨달음과 해탈의 지혜에 이르는 반야경의 요체를 담고 있는 두 가지 주요 경전이다. 무심선원 김태완 선원장이 금강반야경의 한역본 2가지와 문수반야경의 한역본 2가지를 우리말로 옮겼다. 불교 공부에 도움이 되는 풍부한 주석을 붙였고, 일부 구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판본의 번역본을 각주로 소개하여 비교해 볼 수 있게 하였다. 금강반야경은 구마라집의 한역본과 현장의 한역본을, 문수반야경은 삼장 만타라선의 한역본과 현장의 한역본을 번역하였다.

책 속에서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의 생각이 어떠냐? 여래는 ‘나에게는 말할 만한 법이 있다.’고 생각하겠느냐? 수보리여, 그대는 지금 그렇게 보아서는 안 된다.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여, 만약 여래에게 말할 만한 법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여래를 비방하는 것이며 잘 판단한 것이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여, 법을 말하지만 얻을 법은 없다. 그 때문에 법을 말한다고 일컫는 것이다.”(137쪽)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닦는다면, 범부의 법을 버리지도 않고 성현의 법을 취하지도 않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반야바라밀에서는 취할 수 있는 법도 볼 수 없고, 버릴 수 있는 법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닦는다면 좋아할 열반도 볼 수 없고 싫어할 생사도 볼 수 없습니다. 무슨 까닭일까요? 생사라는 것을 볼 수 없는데, 어떻게 버리겠습니까? 열반이라는 것을 볼 수 없는데, 어떻게 좋아하겠습니까?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닦는다면, 버려야 할 번뇌도 볼 수 없고, 취해야 할 공덕도 볼 수 없습니다. 모든 법에서 마음은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습니다. 무슨 까닭일까요?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법의 세계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이와 같을 수 있다면, 일러 반야바라밀을 닦는다고 합니다.(167쪽)
   깨달음의 모습은 공(空)이어서 나타낼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름과 깨달음, 둘 모두 공이기 때문입니다. 이름이 공이기 때문에 언어도 공입니다. ……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은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생기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고, 성취할 것도 없고, 이름도 없고 모습도 없어서 분별할 수 없고, 말도 없고 설명도 없어서 나타낼 수 없고, 오직 미묘(微妙)한 지혜만이 스스로 내면에서 경험하여 압니다. 모든 여래께서 모든 법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끝내 텅 비고 고요함이라는 큰 깨달음을 얻은 것인데, 세간의 필요에 응하여 방편으로 이름을 세운 것입니다.(287-288쪽)

출판사 리뷰

깨달음과 해탈에 이르는 최고의 지혜!
금강반야경, 문수반야경

   조사선 전문가인 무심선원 김태완 선원장이 금강반야경의 한역본 2가지와 문수반야경의 한역본 2가지를 우리말로 옮겼다. 불교 공부에 도움이 되는 풍부한 주석을 붙였고, 일부 구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판본의 번역본을 각주로 소개하여 비교해 볼 수 있게 하였다. 금강반야경은 구마라집의 한역본과 현장의 한역본을, 문수반야경은 삼장 만타라선의 한역본과 현장의 한역본을 번역하였다.

   금강반야경과 문수반야경은 반야경의 요체를 담고 있는 두 가지 중요한 경전이다. 이 가운데 금강반야경 즉 금강경은 한문 번역본이 7종인데,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보는 금강경은 구마라집이 402년에 한역한 금강반야바라밀경이다. 구마라집의 번역은 반복되는 내용들을 간략히 줄이고 이해가 필요한 부분은 조금 풀어서 번역하는 등 의역을 하여 읽기 편하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에 현장은 산스크리트의 원전 내용을 거의 그대로 한문으로 옮기는 직역에 가까운 번역을 하여 원전의 모습을 고스란히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당나라의 현장은 인도에서 가져온 총 600권의 반야경을 대반야바라밀다경이라는 이름으로 660년~663년에 걸쳐 번역하였다. 금강경에 해당하는 부분은 이 방대한 대반야경 속에 능단금강분이라는 이름으로 들어 있다.
   문수반야경은 금강반야경과 함께 반야경의 중심을 이루는 중요한 경전임에도 불구하고 그간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간과되었으며, 우리말 번역서조차 보기 드문 형편이다. 이 책에는 오늘날 캄보디아에 해당하는 양 부남국의 삼장 만타라선이 503년에 한역한 문수사리소설마하반야바라밀경과 현장의 한역본을 번역하여 실었는데, 현장의 한역본은 대반야경 속에 만수실리분이라는 이름으로 들어 있으며 칠백송반야라고도 불린다.
   금강반야경과 문수반야경은 모두 반야바라밀을 가르치는 경전이다. 반야바라밀은 산스크리트 Prajnaparamita를 한자로 음역한 것으로서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지혜’라는 뜻이다. 저 언덕 즉 피안이란 어리석은 망상번뇌의 중생세계인 세간에 대하여 깨달아 망상번뇌에서 해탈한 세계인 출세간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은 망상번뇌에서 벗어나는 방편으로 마련된 지혜, 혹은 망상번뇌에서 벗어나 얻은 지혜를 가리킨다.
   반야경에서는 주로 상(相)과 공(空)이라는 두 가지 방편을 사용한다. 상은 중생의 마음을 가로막아 어둡게 만드는 분별망상을 가리키고, 공은 분별망상에서 벗어난 깨달음의 세계인 불이중도(不二中道)를 가리킨다. 상으로 분별하여 상에 얽매인 마음은 중생의 분별심이고, 상에서 벗어나 불가사의한 지혜를 갖춘 마음은 불심(佛心)이다.
   따라서 상(相)은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고, 공(空)은 성취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반야경은 상을 극복하는 가르침과 공을 성취하는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경전이다. 금강반야경은 상의 극복을 위주로 가르치고, 문수반야경은 공의 성취를 위주로 가르친다. 금강반야경에서는 모든 상(相)이 허망함을 말하면서, 어떤 상도 가지지 말아야 보살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는 말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반면에 문수반야경에서는 모든 것들이 마침내 전부 공(空)임을 끊임없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상을 극복하는 가르침인 금강반야경과 공을 성취하는 가르침인 문수반야경을 본다면 사실상 반야경의 요체를 모두 본다고 할 수 있다.

 

 

 

이전글무심선원 대구 화요법회 안내
다음글<선으로 읽는 사하라의 노래> 신간 안내

No comments yet

Comments are closed

Copyright ⓒ 무심선원. All Rights Reserved. 부산시 해운대구 우동 1434 선프라자 520호. 051) 515-7226. 서울 사무소 02) 2231-72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