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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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조사선의 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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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리달마(菩提達摩)가 인도에서 전해 주었다고 하나, 실제로는 6조(祖)인 조계혜능(曺溪慧能)의 문하에서 발달한 중국의 선종(禪宗)은 조사선(祖師禪)이라는 혁신적인 선법(禪法)을 전개하였다. 조사선은 돈오법(頓悟法)으로서 이전까지 참선(參禪)이라 할 때 일반적으로 행해졌던 점수법(漸修法)인 선정(禪定)을 통한 해탈의 추구라는 좌선관심(坐禪觀心)의 공부방식이 아닌, ‘마음을 바로 가리키면 본성을 보아 깨닫는다.’는 직지인심(直指人心)․견성성불(見性成佛)의 공부법이다. 이것은 ‘황매(黃梅)에서는 무엇을 가리켜 줍니까?’ 하고 묻는 인종(印宗)의 물음에 혜능은 ‘가리켜 주는 것은 없다. 다만 견성(見性)을 말할 뿐, 선정(禪定)과 해탈을 말하지는 않는다.’고 대답하고, 다시 인종이 ‘왜 선정과 해탈을 말하지 않습니까?’ 하고 묻자 혜능이 ‘그것은 이법(二法)이기 때문에 불법(佛法)이 아니다. 불법은 불이법(不二法)이다.’ 하고 대답하는 곳에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은 일체의 분별경계를 떠난 공성(空性)을 모든 경우에 실현하는 것을 나타낸다. 이미 『반야경』 이래로 일체법의 진여자성(眞如自性)은 분별된 이상(二相)을 떠난 공이요 중도라는 사실을 대승불교에서는 거듭 밝히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경전의 주장은 이론으로 받아들여졌고, 공의 실천은 선정(禪定)과 관법(觀法)이라는 다른 하나의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즉, 이전까지는 만법의 실상이 불이(不二)의 중도요 공이라는 주장을 말로써 선언하고, 다시 그러한 실상을 확인하기 위하여 선정이나 관법을 행할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법(二法) 위에 서서 불이법(不二法)을 말하는 자기모순에 빠진 것이었다. 즉 말로는 불이법을 주장하면서 행동은 이법에 따라서 행하는 언행(言行)의 불일치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마치 조용한 교실에서 큰 소리로 ‘조용히 해야 한다.’고 외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비하여 조사선은 즉각 입을 다물어 버림으로써 말과 행동을 일치시킨 것이다. 불이법(不二法)은 지금 불이법을 말하는 여기에서 실현되지 않으면 달리 실현될 곳이 없다. 만약 둘이 아닌 중도를 주장하면서 다시 중도를 찾아서 어떤 행동을 한다면, 이것은 말로는 둘이 아님을 주장하지만 말과 행동을 둘로 나누는 모순에 빠진 것이다. 조사선은 바로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고 그 즉시 불이의 중도를 실현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단경(壇經)』에서 혜능이 “말에도 통하고 마음에도 통하면, 마치 해가 허공에 떠 있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을 나타낸다.

   불이의 중도는 곧 공(空)이요 반야(般若)로서, 『반야경』에서 ‘머묾도 아니고 머묾 아님도 아니다.’[無住無不住]라고 하는 ‘머묾 없음에 머무는 것’[住無所住]이다. 『반야경』이 이러한 불이법을 말과 이치로써 주장했다면, 『유마경』에서는 유마힐의 행동을 통하여 이 불이법의 실현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선종의 승려들이 『반야경』과 『유마경』을 주로 인용하거나 응용하여 가르침을 펼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말하자면, 조사선(祖師禪)과 그 계승인 간화선(看話禪)은 지금 여기에서 즉각 ‘머묾 없는 곳에 머물기’를 요구하는 것으로서, 무주(無住)의 철저한 실현이다. 이것은 곧 대승불교의 본질인 반야바라밀의 실행이 바로 조사선에서 가장 철저하게 실현된 것을 가리킨다. 『단경』에서 “마하반야바라밀이 가장 존귀하고 가장 훌륭하고 첫째가는 것이니, 머묾도 없고 가는 일도 없고 오는 일도 없다.”고 하거나, “머묾 없음이 근본이다. … 머묾 없음은 사람의 본성으로서, … 모든 법 위에서 순간순간 머물지 않으면 결박이 없을 것이니, 이것이 곧 머묾 없음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다.”고 하거나, “머묾 없는 근본은 반야(般若)를 일컫는 것이다.”고 하는 말들이 바로 이것을 나타낸다.

   “자신의 본성을 보면, 움직이지도 않고 고요하지도 않으며, 생겨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으며,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으며, 옳지도 않고 틀리지도 않으며, 머물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고 하는 것처럼 견성(見性)은 곧 무주(無住)이다. 그리고 “세존이 입멸한 이래로 서천(西天)의 28대 조사(祖師)가 모두 무주(無住)의 마음을 전하였다.”고 하듯이 이심전심으로 전한 것이 바로 무주(無住)인 것이다. 그러므로 조사선의 본성은 무주(無住)이다.

   조사선의 특징은 이 무주를 말로 선언해 놓고 그 실현을 위하여 다른 무엇을 찾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바로 여기 이 순간에 무주를 실현하는 것이다. 즉 조사선에서는 언제나 분별을 넘어서 머묾 없는 곳에 머물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혜능은 ‘무주가 근본’이라고 말하는 신회(神會)를 말로써 분별하는 것은 견성이 아니라고 크게 꾸짓는 것이다. 조사선에서는 좌선관심(坐禪觀心)의 방법을 버리고 설법(說法)과 문답(問答)을 공부의 방법으로 하고, 간화선에서는 이것을 계승하여 화두(話頭)를 공부의 방법으로 한다. 설법에서는 마음의 본성이 무주라는 사실을 여러 대승경전을 인용하여 밝히고, 문답에서는 언제나 분별로 헤아리는 것을 차단시켜 버림으로써 그 즉시 무주에 머물 것을 요구한다. 화두 역시 경전의 내용이나 문답의 구절을 재료로 삼지만, 요구하는 것은 바로 그 자리에서 머묾 없음에 머물러 모든 한계를 벗어나 해탈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예컨대, 남양회양이 좌선(坐禪)에 몰두하는 마조도일을 꾸짓어 일깨우는 말인, “너는 좌선을 배우느냐? 좌불(坐佛)을 배우느냐? 좌선을 배운다면 선은 앉고 눕는 것이 아니며, 좌불을 배운다면 불(佛)은 정해진 모습이 아니다. 무주법(無住法)에서 취하거나 버려서는 안되는 것이다.”는 그 즉시 일체법에 머묾이 없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 백장이 정병(淨甁)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정병이라고 불러서는 안된다. 너는 무엇이라고 부르겠느냐?”라고 말하는 것이나, 덕산(德山)이 “말을 해도 30방 맞아야 하고, 말을 하지 못해도 30방 맞아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나, 『무문관』 제4칙에서 혹암(或庵)이 “서천의 달마는 왜 수염이 없는가?”라고 말한 것이나, 무엇이 부처냐는 물음에 운문(雲門)이 “마른똥막대기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나, 여타 화두(話頭)가 모두 그 즉시 분별사량에서 벗어나 머묾 없음에 머물러 해탈자재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