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선이란

   아래의 글은 김태완 선생님의 저서 <간화선 창시자의 선 - 상권>에 나오는 내용을 간추린 것입니다. 간화선과 조사선에 대한 상세 내용을 확인해 보시려면 <간화선 창시자의 선 - 상·하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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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교와 선

(2) 선의 주요한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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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불교(佛敎)라 하고, 조사(祖師)들의 가르침을 선(禪)이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든 조사의 가르침이든 모두 깨달음으로 이끄는 방편이다. 불교가 깨달음으로 이끄는 방편이듯이 선도 깨달음으로 이끄는 방편이지만, 선은 기존의 불교 속에서 기존 불교의 단점을 극복하고 새롭게 발전하여 나타난 방편이다. 간단히 말하면, 선은 기존의 불교에서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하여 내세운 방편들이 도리어 깨달음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는 문제점을 극복하고, 단계적 수행을 통하지 않고 곧장 깨달음으로 들어가도록 하려는 새로운 불교이다.

   불교의 방편이란 중생의 어리석은 망상을 부수고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수단이다. 마치 병이 있을 경우에 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약과 같다. 약은 병에 대응하여 필요할 뿐, 병이 없으면 약도 필요 없다. 중생은 본래 완전한 깨달음을 갖추고 있으므로 본래는 약이 필요 없지만, 스스로 분별망상이라는 병을 일으켜 앓고 있으므로 분별망상이라는 병을 없애는 약이 필요하다. 불교의 모든 방편은 깨달음을 가로막는 중생의 병인 분별망상을 없애는 약이다.

   불교에서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하여 세워 놓은 가장 중요한 방편은 말씀인 경전(經典)과 수행(修行) 둘이다. 경전은 깨달음이 무엇이며, 깨달음을 가로막는 망상은 무엇이며, 어떻게 망상을 없애고 깨달음으로 가는가를 언어문자(言語文字)로써 설명해 놓은 말씀이요 이론이다. 수행은 이론에 따라서 마음과 육체로써 행하는 행동인 실천이다. 깨달음으로 가는 데 필요한 이론과 실천인 경전과 수행 이 두 가지가 불교에서 세운 방편의 핵심이다.

   그런데 경전에 있는 가르침의 말씀은 분별에 속하는 언어문자로 이루어져 있고, 수행 역시 의도적으로 행해야 하는 일정한 격식을 갖추고 있으므로 분별에 속한다. 다시 말하여, 말씀과 수행이 분별망상을 부수기 위한 방편이지만, 말씀과 수행 역시 분별망상에 속한다. 비유하면 약이 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지만, 약 역시 건강한 몸에는 불필요한 해로운 물질인 것과 같다.

   그러므로 비록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한 방편으로서 가르침의 말씀과 수행을 세웠으나, 공부하는 사람이 만약 이들 방편에 사로잡혀 벗어나지 못한다면 도리어 이들 방편이 깨달음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금강경>에서는 “내가 법을 말하는 것은 마치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법도 오히려 버려야 하는데, 하물며 법 아닌 것이야 말할 필요도 없느니라.”라고 하였듯이, 방편이 오히려 장애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선 어리석은 범부를 일깨워서 망상분별의 장애를 벗어나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하여 여러 가지 말씀들을 방편으로 하시고 또 여러 가지 수행을 방편으로 시키셨지만, 범부들은 오히려 방편인 말씀과 수행에 집착하여 깨달음에 장애를 만들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마치 오로지 약에만 의지하여 생활하려 하거나, 뗏목을 버리지 않으려고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그 이유는 공부하는 학인들이 방편에 대해서는 잘 이해하여 알고 있으나, 방편을 떠난 깨달음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남기신 말씀과 실천수행이라는 두 가지 방편은 분별로써 헤아려 이해할 수 있으므로, 분별망상 속에 있는 범부중생들이 잘 이해할 수 있고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깨달음은 분별을 벗어난 것이므로 범부중생들은 전혀 알 수 없다. 전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의지할 수도 집착할 수도 없지만, 잘 아는 것에 대해서는 의지하고 집착하기가 쉽다. 바로 이 까닭에 학인들은 부처님이 남기신 말씀과 시키신 실천수행에만 집착하게 되는데, 도리어 이러한 집착이 깨달음을 가로막는 장애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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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방편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등장한 것이 바로 선이다. 선종(禪宗)에서는 전통적인 불교를 교(敎)라고 부르고 스스로를 선(禪)이라고 불러, 불교와 선을 대비하여 말한다. 그리하여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라 하고,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라고 한다. 교는 깨달음으로 이끄는 부처님의 말씀을 모아 경전을 만들고 그에 의거하여 공부하는 것이라면, 선은 부처님의 깨달음이 부처님으로부터 역대 조사들을 거치면서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심전심(以心傳心) 전해져 왔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통 선의 특징을 말할 때에,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이심전심(以心傳心),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말한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심전심 전해 온 것은 무엇인가? 부처님의 깨달음이며, 깨달은 마음이다. 불교의 목적은 마음의 번뇌에서 해탈하는 것이다. 육체의 고통을 치유하는 것이 의학이라면,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는 것이 불교이다. 부처님을 대의왕(大醫王)이라고 하는데, 의사 중에서 최고의 의사라는 말이다. 그 까닭은 육체의 고통은 치유하더라도 결국 다시 병이 드는 고통과 죽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마음의 고통인 번뇌를 깨달음이라는 이름으로 치유하면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과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때문이다. 이처럼 번뇌에서 벗어난 마음이 깨달은 마음이고 부처님의 마음이다. 이심전심으로 전해 온 것은 바로 이 깨달은 마음이요 부처님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선에서는 마음이 바로 부처라고 한다. 또 마음을 그 드러나 보이는 모습인 상(相)만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본질인 성(性)을 본다고 하여 견성(見性)이라고도 한다. 견성이란 곧 깨달은 마음이다.

   이처럼 부처님의 깨달은 마음을 전하여 제자들 역시 마음을 깨달아 깨달은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 곧 선이다. 그렇게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선의 특성을 말하여 불립문자․교외별전․직지인심․견성성불이라는 네 구절로 나타낸다. 이 네 구절은 각각 둘씩 짝을 지어 양 측면을 말하고 있는데, 불립문자와 교외별전이 짝을 이루고 직지인심과 견성성불이 짝을 이룬다. 불립문자․교외별전 즉, 문자를 세우지 않고 가르침의 말씀인 교(敎) 밖에서 따로 전한다는 것은, 언어문자라는 방편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직지인심․견성성불 즉, 마음을 곧장 가리킴으로써 자기 마음의 본성을 보아 깨닫는다는 것은, 수행이라는 방편에 의지하지 않고 곧장 깨달음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 네 구절은 선이 문자로써 설명하지 않고, 수행에 의지하지 않고 곧장 깨달음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선이라는 방편의 특징을 간단히 말하면, 문자로 설명하지도 않고 수행에 의지하지도 않고 곧장 사람의 마음을 가리키고 마음의 본성을 보아 깨닫는다.

   곧장 가리키는 사람의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선에서는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고 하여 당장 이 마음이 바로 부처라고 한다. 당장 이 마음이 부처이므로 당장 이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직지인심으로 곧장 가리키는 사람의 마음이란 바로 부처의 마음이요 깨달음의 마음이요 해탈의 마음이요 열반의 마음으로서, 분별망상에서 벗어난 불이(不二)의 마음이요 중도(中道)의 마음이다. 선에서는 이 마음을 즉심(卽心), 차심(此心), 직심(直心), 무심(無心), 비심(非心) 등으로 표현한다. 즉심, 차심, 직심은 당장 이 마음이라는 말이고, 무심, 비심은 당장 이 마음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분별되는 사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분별된다면 그것은 불이중도(不二中道)의 마음이 아니고 마음이라는 개념으로 분별된 망상(妄相)이다.

   이 마음은 애초부터 깨달음의 마음이요 불이중도의 마음으로서 수행을 거쳐서 얻어지는 마음이 아니다. 갈고 닦는 수행을 통하여 얻는 새로운 마음이 아니므로, 이 마음을 평소의 마음 즉 평상심(平常心)이라고도 한다. 더러움에 물든 마음을 갈고 닦아서 깨끗한 마음으로 만드는 것이 해탈이나 깨달음은 아니다. 깨달음은 이 마음의 참된 모습인 실상(實相)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들 범부중생은 자신의 분별(分別) 때문에 자기 마음의 실상을 보지 못하고 자기 마음의 망상(妄相)을 본다. 그러므로 자신의 분별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자기 마음의 실상을 본다.

   자신의 분별에서는 어떻게 벗어나는가? 우리의 분별은 마치 허망한 꿈과 같다. 꿈속에서도 모든 일들이 깨어 있을 때와 동일하게 나타나지만, 그 모두는 진실이 아니고 헛된 환상이다. 꿈이라는 헛된 환상에서 벗어나는 길은 꿈속에서 꿈을 버리고 깨어 있음을 얻는 것이 아니다. 꿈속에서는 꿈도 꿈이고 깨어 있음도 꿈이다. 꿈속에서 꿈을 버리고 깨어 있음을 취할 것이 아니라, 단지 문득 꿈에서 깨어나기만 하면 모든 환상은 사라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분별 속에서 망상을 버리고 실상을 취하는 것이 깨달음이 아니며, 분별 속에서 어리석음을 버리고 지혜로움을 취하는 것이 깨달음은 아니다. 단지 분별이라는 꿈에서 문득 깨어나기만 하면 곧 깨달음이다. 이처럼 깨달음은 어리석음과 망상을 닦아내고 털어내어 지혜와 실상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어리석음과 지혜로움 또 망상과 실상을 분별하는 분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수행을 통하여 망상을 버리고 실상을 취하는 단계적인 일이 아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언제나 분별이라는 꿈속에서 분별에 의지하여 살아왔으니, 분별에서 벗어난다는 말 역시 분별 속에서 말하고 분별 속에서 듣고 분별 속에서 생각하고 있을 뿐, 참으로 분별에서 벗어나는 길은 전혀 분별하지 못한다. 꿈속에서 꿈을 깨어나는 것을 말하더라도, 이 모두는 꿈이어서 참으로 꿈을 깨어나는 길은 전혀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분별에서 벗어나려면 분별에서 벗어난 스승을 만나서 그 가르침에 의지하여야 한다. 분별에서 벗어난 스승은 이미 분별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분별에서 벗어나는지를 알고 있다. 분별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학인(學人)은 분별에서 벗어난 스승의 가르침에 의지하여야 비로소 분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스승은 결국 학인의 분별이 작용하지 못하는 곳으로 학인을 끌고감으로써 학인의 분별이 저절로 적멸(寂滅)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처럼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서 학인이 깨닫게 되므로 선에서 깨달음은 언제나 언하변오(言下便悟)이다. 말을 듣고서 곧장 깨닫는 것이 바로 선에서의 깨달음이다. 따라서 선의 특징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 즉심시불(卽心是佛) : 깨달음은 마음의 일이다.
② 견성성불(見性成佛) : 모습이 아니라 불이(不二)의 법성(法性)을 본다.
③ 직지인심(直指人心) : 분별을 배제하고 마음을 바로 가리킨다.
④ 도불용수(道不用修) :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다.
⑤ 언하돈오(言下頓悟) : 선지식의 말을 듣고 문득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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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견성은 불이법(不二法)이다

(2) 견성(見性)이 발생할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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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불법은 불이법(不二法)이다

   모든 모습은 마음에서 만들어지므로, 모든 모습은 허망하다. 모든 모습을 모습이 아니게 보면 본래 모습 없는 마음을 보는 것이니 곧 여래를 보는 것이다. 모습을 모습이 아니게 본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모습으로 보면 모습으로 분별하는 것이고, 모습을 모습 아니게 보면 모습을 분별하는 것이 아니다. 분별하면 둘로 나누는 것이고, 분별하지 않으면 둘로 나누지 않는 것이다. 마음을 모습으로 보면 이법(二法)이고, 모습으로 보지 않으면 불이법(不二法)이다. 모습으로 보면 어떤 모습이 있고, 모습으로 보지 않으면 모습 있음이 곧 모습 없음이다. 마음을 모습으로 보면 마음이 있고, 마음을 모습으로 보지 않으면 마음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마음을 모습으로 보면 망상이고, 마음을 모습으로 보지 않으면 망상도 아니고 실상도 아니다. 마음을 모습으로 보면 상(相)이라 하고, 마음을 모습으로 보지 않으면 성(性)이라 한다. 마음은 본래 하나이다. 본래 하나인 마음을 상(相)과 성(性)으로 나누어 말하니, 비유하면 상(相)은 물결을 보는 것이고 성(性)은 물을 보는 것이지만 물결과 물은 둘이 아니다.

   모습은 모습이 아니라는 말은 연필은 연필이 아니라는 말처럼 논리적으로 무의미한 말이니, 분별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분별이 끊어졌으니 불가사의(不可思議)이고 불이중도(不二中道)이다. 불가사의한 불이중도의 법 즉 불이법(不二法)을 보는 것을 견성(見性)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견성에서는 분별이 끊어지고, 마음이라고 할 만한 물건도 없으니 무심(無心)이고, 얻을 만한 것이 없다. 마음이라고 할 무엇이 있고 얻을 것이 있다면, 곧 분별이고 이법(二法)이다. 육조혜능은 “이법(二法)이기 때문에 불법(佛法)이 아니다. 불법은 불이법(不二法)이다.”라고 명백하게 선언하고서, 다시 말하기를 “불성(佛性)을 명백히 보는 것이 곧 불법이 불이법(不二法)인 것이다. … 불성은 선하지도 않고 선하지 않지도 않으니, 이것을 일컬어 불이(不二)라고 한다. 오온(五蘊)과 십팔계(十八界)를 범부는 둘로 보지만, 지혜로운 자는 그 자성(自性)에 둘이 없음을 밝게 안다. 둘이 없는 자성(自性)이 곧 불성(佛性)이다.”라고 밝혔다.

   불이법이므로, 있다거나 없다고 분별할 수 없고, 취하거나 버릴 수 없고, 이것이라거나 저것이라고 나눌 수 없고, 부처니 중생이니 하고 이름 붙일 수 없고, 알거나 모른다고 할 수 없고, 얻거나 잃을 수 없고, 맞거나 틀리다고 할 수 없고, 옳거나 그르다고 할 수 없고, 좋거나 나쁘다고 할 수 없고, 어리석다거나 깨달았다고 할 수 없고, 머물 곳도 없고, 생각으로 헤아릴 수도 없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모든 선한 생각 악한 생각을 응당 모두 없애야 한다. 이름 붙일 만한 이름이 없지만, 자성을 일러 둘이 없는 성품이라고 하니, 이것이 바로 진실한 자성이다.” – 육조혜능

“즉시 도를 알고자 하는가? 평상심(平常心)이 바로 도이다. 무엇을 일러 평상심이라 하는가? 조작하지 않고,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으며, 취하거나 버리지도 않고, 끊어짐이 있다거나 끊어짐이 없다고 헤아리지 않으며, 범부도 아니고 성인도 아닌 것이 바로 평상심이다. 경전에 말하기를, ‘범부의 행위도 아니고 성인의 행위도 아닌 것이 바로 보살의 행위이다.’라고 하였다.” – 마조도일

“악(惡)에 부딪치는 대로 악에 머무는 것을 ‘중생의 깨달음’이라 하고, 선(善)에 부딪치는 대로 선에 머무는 것을 ‘성문(聲聞)의 깨달음’이라 하며, 선악(善惡) 양쪽에 머물지 않고 머물지 않음을 옳다고 여기는 것을 ‘이승(二乘)의 깨달음’ 또는 ‘벽지불의 깨달음’이라 한다. 선악 양쪽에 머물지 않음으로 돌아가고 또 머물지 않는다는 지해(知解)도 내지 않음을 ‘보살의 깨달음’이라 하는데, 이미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또 머물 것이 없다는 지해(知解)도 내지 않아야만 비로소 ‘부처님의 깨달음’이라 한다.” – 백장회해

“범부는 경계를 취하고 도인은 마음을 취하지만, 마음과 경계 모두를 잊어야 참된 법이다.” – 황벽희운

“밝은 눈을 가진 도 배우는 이라면 마구니와 부처를 모두 쳐버려야 한다. 그대가 만약 성인을 좋아하고 범부를 싫어한다면, 생사(生死)의 바다에서 떴다 가라앉았다를 계속할 것이다.” – 임제의현

“만약 이 두 분이 활용한 곳을 알아차린다면, 일상생활 가운데 경계에 접촉하고 인연을 만나는 곳에서 세제(世諦)를 펼치지도 않고 불법(佛法)의 이론을 만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미 이 두 쪽에 발을 딛지 않는다면, 자연히 한 개 살아날 길이 있음을 반드시 알 것입니다.” – 대혜종고

“불법은 지극히 묘하여 둘이 없다. 다만 아직 묘한 곳에 이르지 못했다면 서로 길고 짧음이 있다. 진실로 묘한 곳에 이르면 마음을 깨달은 사람이니, 자신의 마음이 마지막 진실이고 본래부터 깨달아 있음을 진실하게 알 것이고, 진실하게 자재(自在)할 것이고, 진실하게 안락할 것이고, 진실하게 해탈할 것이고, 진실하게 깨끗할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오직 자기의 마음을 쓸 뿐이니, 자기 마음의 변화를 붙잡으면 바로 쓸 뿐, 옳고 그름은 묻지 말라. 마음으로 헤아리고 사량하면 바로 옳지 않게 된다.” – 운암진정


② 불이법에는 얻을 것이 없다

   선에서는 모습에 머물지 않는 불이중도(不二中道)의 본래 마음을 나타내는 방편의 말로서 ‘얻을 것이 없다’는 구절을 자주 사용한다. 얻거나 잃는 것은 곧 있다거나 없다는 것처럼 양쪽에 떨어진 이법(二法)이요 분별이다. 공부를 하여 어떤 경지(境地)를 얻었다거나, 어떤 능력을 얻었다거나, 어떤 힘을 얻었다거나 하는 것들은 모두 분별이니 망상이다. 마음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깨달음의 마음이라는 무엇을 얻고자 하는 잘못된 욕구를 가지는 경우는 매우 흔하다. 이러한 잘못에 떨어지지 말라는 경고로써, 본래 마음을 깨달으면 달리 얻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다라고 하는 방편의 말을 한다.

“얻을 수 있는 법이 조금도 없음을 일러 위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이라 한다.” – 금강경

“자성에는 본래 얻을 수 있는 하나의 법도 없다. 만약 얻는 것이 있어서 망령되게 화복(禍福)을 말한다면 이것이 바로 번뇌요 잘못된 견해이다. 그러므로 이 법문에서는 무념을 세워서 으뜸으로 삼는다.” – 육조혜능

“성문(聲聞)은 성인(聖人)의 마음에는 본래 지위(地位)․인과(因果)․계급(階級)이 없다는 것을 모르고, 마음으로 헤아려 수행이 원인이고 깨달음이 결과라고 허망하게 생각한다. 마음을 비우는 선정에 머물러 긴긴 시간을 지나면, 비록 깨닫는다고 하여도 깨닫고 나서 다시 미혹해진다.” – 마조도일

“부처는 구함이 없는 사람이니, 구하면 도리에 어긋난다. 도리는 구함이 없는 도리이니, 구하면 잃는다. 만약 구함 없음에 집착하면, 도리어 구하는 것과 같다. 만약 무위(無爲)에 집착하면, 도리어 유위(有爲)와 같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하기를 ‘법을 취하지도 않고, 법 아닌 것을 취하지도 않고, 법 아님이 아닌 것도 취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여래께서 얻은 법은 진실도 아니고 헛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 백장회해

“본래의 부처에게는 진실로 한 물건도 없으니, 텅 비어 통하고 고요하면서 밝고 묘하고 안락할 뿐이다. 깊으면 저절로 깨달아 들어가니 곧장 바로 이것이다. 모자람 없이 다 갖추고 있어서 전혀 부족함이 없다. 비록 무한한 세월 동안 정진수행하고 모든 지위를 거치더라도, 한 순간 깨달을 때에 이르러서는 다만 원래의 자기 부처를 깨달을 뿐, 그 위에 다시 한 물건도 더할 수 없다. 깨달았을 때에 오랫동안 행해 온 노력을 돌이켜 보면 모두가 꿈속의 허망한 짓일 뿐이다. 그래서 여래는 말하기를 ‘나는 위 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에서 참으로 얻은 것이 없다. 만약 얻은 것이 있다면, 연등부처는 나에게 수기(授記)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니, 이것을 일러 깨달음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 황벽희운

“그대들은 곳곳에서 ‘닦을 것도 있고 깨달을 것도 있다’라고 말들 하지만, 착각하지 말라. 설사 닦아서 얻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생사(生死)의 업(業)이다. 그대들은 또 육도(六度)와 만행(萬行)을 고루 닦는다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모두가 업을 짓는 일이다.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하는 것은 곧 지옥 갈 업을 짓는 것이고, 보살을 구하는 것 역시 업을 짓는 일이며, 경전을 보고 가르침을 살피는 것 역시 업을 짓는 일이다.” – 임제의현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고 조사가 서쪽에서 왔지만, 역시 전해 줄 수 있는 법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전해 주고 전해 받는 것은 무명(無明)의 법이요 유위(有爲)의 법이지, 지혜의 법도 아니고 무위(無爲)의 법도 아닙니다.” – 대혜종고


③ 불이법에는 단계가 없다 

   선에서는 불이중도의 마음을 나타내는 방편의 말로써 단계가 없다는 말을 한다. 마음은 불이법(不二法)으로서 둘이 아니니 원래 단계가 없다. 그러므로 수행한다고 하여 마음이 단계적으로 점차로 달라져가는 일은 없다. 만약 수행하여 마음이 점차로 달라져가는 단계가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마음의 변화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니 본래 불이법인 마음은 아니다. 수행하는 사람들이 순간순간 경험하는 마음의 모습을 분별함으로써, 흔히 이런 잘못에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단계가 없다는 방편의 말은 바로 이런 잘못에 떨어지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이 마음은 수행과는 상관 없이 언제나 여여(如如)하다. 이 여여한 마음을 모습으로 분별하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마음이라는 모습이 없어지면, 본래 마음은 언제나 여여하다. 그러므로 무심(無心)이 곧 도(道)라고 하는 것이다.

“자성에는 시비도 없고 어리석음과 지혜도 없고 혼란됨과 안정됨도 없다. 순간순간 반야로서 비추어보아 늘 법상(法相)에서 벗어나 자유자재하게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세울 무엇이 있겠는가? 자성을 스스로 깨달으면, 문득 깨닫고 문득 수행하니, 또한 점차(漸次)가 없다. 그러므로 일체법을 세우지 않는 것이다. 모든 법이 적멸(寂滅)한데 어찌 점차 닦을 것이 있겠는가?” – 육조혜능

“성문(聲聞)은, 성인(聖人)의 마음에는 본래 지위(地位)․인과(因果)․계급(階級)이 없다는 것을 모르고, 마음으로 헤아려 허망한 생각을 하여 원인을 닦아 결과를 얻으려 한다.” – 마조도일

“만약 상근기(上根器) 중생이라면 문득 선지식(善知識)의 가르침을 받고서 말을 듣고 바로 알아차려서, 다시는 계급과 지위를 거치지 않고 즉시 본성을 깨닫는다.” – 마조도일

“따라서 도를 배우는 사람이 자기의 본래 마음을 잃고 자기의 본래 마음이 부처임을 알지 못하고, 밖에서 찾고 구하며 애써 노력하여 순차적으로 깨달으려 한다면, 무한한 세월을 애써 구하더라도 영원히 깨달음을 이루지 못할 것이니, 당장 마음이 없음만 못하다.” – 황벽희운

“그러므로 조사(祖師)는 모든 중생의 본래 마음을 곧장 가리켰던 것이다. 마음의 본바탕이 본래 부처이니, 수행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단계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며, 밝거나 어두운 것도 아니다. 밝음이 아니기 때문에 밝음이 없고, 어둠이 아니기 때문에 어둠이 없다. 그러므로 무명(無明)도 없고 무명이 다함도 없다.” – 황벽희운

“한 번 마침에 모두를 마치는 것이며, 한 번 깨달음에 모두를 깨닫는 것이며, 한 번 증득(證得)함에 모두를 증득하는 것입니다. 마치 한 타래의 실을 끊음에 한 번 끊으면 한꺼번에 끊어지는 것처럼, 가없는 법문을 증득함에도 단계란 없습니다.” – 대혜종고


④ 불이법에는 머묾이 없다

   불이중도(不二中道)란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무주(無住)이다. 육조혜능은 <금강경>의 “머묾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구절을 듣고서 깨달았다고 한다. 마음이 어디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곧 분별 속에 있는 것이다. 머물 곳이 있다는 것은 분별이기 때문이다. 마음이라는 물건도 얻을 수 없는데, 마음이 머물 곳이 어디에 있겠는가? 마음이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것이 바로 범부중생이 분별하여 집착하는 것이고, 그 머물러 있는 곳에 얽매여 자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음과 해탈은 곧 무주(無住)이다.

“자신의 본성을 보면, 움직이지도 않고 고요하지도 않으며, 생겨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으며,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으며, 옳지도 않고 틀리지도 않으며, 머물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 – 육조혜능

“머묾 없는 법에서는 취하거나 버리지 말아야 한다.” – 마조도일

“만약 더럽거나 깨끗한 마음이 사라지면, 얽매임에도 머물지 않고 해탈에도 머물지 않아서, 유위(有爲)․무위(無爲)․얽매임․해탈 등의 마음의 테두리가 일절 없어서, 삶과 죽음 속에서도 그 마음이 자재할 것이다.” – 백장회해

“모든 법은 본래 가질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고, 머물 곳도 없고, 주관도 없고, 객관도 없음을 명확히 알아서 허망한 생각을 내지 않으면, 곧장 깨달음을 얻는다.” – 황벽희운

“그대가 생사(生死)․거주(去住)․탈착(脫著)에 자유롭기를 바란다면, 지금 법을 듣는 사람을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은 형상도 없고 근본도 없고 머무는 곳도 없이 활발발하게 움직여서 수만 가지 경계를 시설(施設)하지만, 작용(作用)하는 곳이 따로 없다.” – 임제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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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성(見性)은 불이법문(不二法門)이니 분별에서 벗어나야 한다. 분별에서 벗어나는 길은 둘이다. 첫째는 분별이 완전히 사라져 분별의식(分別意識)이 전혀 없는 것으로서, 나무토막이나 돌멩이 같은 무정물(無情物)과 같이 되는 것이다. 둘째는 분별하면서 분별 속에서 분별에서 벗어나 분별이 없는 것이다. 불이법문은 둘째에 해당한다. 분별이면서 분별이 아니니 분별과 분별에서 벗어남이 둘이 아니다.

   분별하면서 분별 속에서 분별에서 벗어나 있다는 말은 이치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 무의미한 말이다. 이것은 마치 ‘사과이면서 사과가 아니다’ ‘밀감이면서 밀감이 아니다’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이것은 ‘사과는 사과이고 밀감은 밀감이다’라는 분별이 깨어져 버린 말이다. 그러나 불이법문이란 본래 분별을 떠난 것이니 당연히 이렇게 분별이 깨어진 형태로 표현되는 것이다. <금강경>에서 “모든 모습이 모습이 아니다.”라거나 “여래께서 말씀하신 몸의 모습은 곧 몸의 모습이 아니다.”라거나,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법은 모두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니 법도 아니고 법 아닌 것도 아닙니다.”라거나, “불법이라는 것은 불법이 아니다.”라는 말들이 모두 이런 말이다.

   이 때문에 불이법문을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가는 곳이 사라졌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견성(見性)으로 향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우선 분별에 머물면 안 된다. 분별에 머물지 않고 분별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한다고 하면 곧 분별이니,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없다. 어떻게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 역시 분별이니, 어떻게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할 수 없다. 단지 분별에 머물지 말라고 경고할 뿐, 어떻게 하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대가 마음의 요체를 알고자 한다면, 단지 모든 좋고 나쁨을 전혀 생각하지 말라. 그러면 저절로 깨끗한 마음의 바탕에 들어가, 맑고 늘 고요하면서도 묘한 작용이 끝이 없을 것이다.” – 육조혜능

“다만 양쪽으로 분별되는 말을 끊기만 하라. 있다는 말과 있지 않다는 말을 끊고, 없다는 말과 없지 않다는 말을 끊으면, 양쪽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아서 그대는 양쪽에 붙잡히지 않을 것이고 숫자로 헤아리는 것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 백장회해

“다만 모든 법에서 있다거나 없다는 견해를 내지 않으면, 곧 법을 보는 것이다.” – 황벽희운

“그대들이 진실하게 공부하려고 한다면, 다만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마치 완전히 죽은 사람처럼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해야 한다.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곳에서 문득 이 한 생각이 부서지게 되면, 부처님도 그대들을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 대혜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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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禪)의 가장 주요한 특징 하나는 어떤 종류의 수행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깨달음은 수행을 통하여 얻는 것이 아니다. 갈고 닦는 수행이라는 행위가 원인이 되어 깨달음이라는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보통 사람들은 선이라는 말을 들으면 좌선(坐禪)하여 선정(禪定)에 들어가는 수행을 떠올리지만, 육조혜능(六祖慧能) 문하의 조사선(祖師禪)은 좌선에 의지하지도 않고 선정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조사선이란 선지식이 곧장 본래 마음을 가리키면, 그 말씀을 듣고서 곧장 불이중도(不二中道)를 깨닫는 돈오(頓悟)의 깨달음일 뿐이다. 직지인심(直指人心)․견성성불(見性成佛)이지 좌선선정(坐禪禪定)이나 좌선간심(坐禪看心)은 아닌 것이다.

   수행이란 곧 유위(有爲)의 조작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그 결과 역시 조작된 결과가 나온다. 조작된 결과는 우리의 본래 마음이 아니고, 불이중도인 자성(自性)도 아니다. 불이중도란 마음이 어디로 향하지도 않고 어디에 머물지도 않고 어떤 조작하는 행위도 없는 무위(無爲)의 깨달음이다. 마음은 본래 원만구족하여 중생의 마음과 부처의 마음이 따로 없다. 수행하여 나아갈 곳이 따로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에는 어떤 수행도 없다. 범부의 마음이나 부처의 마음이나 하나의 마음이지만, 범부는 다만 스스로 일으킨 분별에 속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선지식이 일깨우는 한 마디 말을 듣고서 범부 스스로 곧장 망상의 꿈에서 깨어나면 그뿐인 것이다.

(1) 육조혜능의 돈교법문

(2) 남악회양

(3) 마조도일

(4) 황벽희운

(5) 임제의현

(6) 대혜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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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돈교(頓敎)의 불이법문(不二法門)

    시장에서 나무를 팔다가 <금강경>의 구절을 듣고서 깨달음을 얻은 혜능은 기주(蘄州)의 황매산(黃梅山)으로 오조홍인(五祖弘忍)을 찾아가 8개월만에 오조가 설법하는 <금강경> 구절을 듣고서 다시 크게 깨달았다. 깨달음을 얻은 혜능이 오조에게서 물려받은 것은 달마(達磨)에게서 전해 온 돈교(頓敎)와 의발(衣鉢)이었다. 옷과 발우는 돈교를 전해받았다는 신표이니, 옷과 발우가 나타내는 내용은 바로 돈교이다. 혜능이 돈교를 받은 까닭은 오조가 말해주는 <금강경> 구절을 듣고서 문득 깨달아 온갖 법이 자성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때 혜능이 오조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말한 구절이 <육조단경>에는 이렇게 실려 있다.

“어찌 자성이 본래 깨끗함을 기대했겠습니까?
어찌 자성이 본래 생멸(生滅)하지 않음을 기대했겠습니까?
어찌 자성이 본래 모자람 없이 완전함을 기대했겠습니까?
어찌 자성이 본래 흔들리지 않음을 기대했겠습니까?
어찌 자성이 만법(萬法)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기대했겠습니까?”

   자성이 본래 깨끗하니 다시 닦을 필요가 없고, 자성이 본래 생겨나거나 사라지지 않으니 다시 생멸에서 벗어날 이유가 없고, 자성이 본래 모자람 없이 완전하니 보충해 넣을 것이 없고, 자성이 본래 흔들리지 않으니 고요함을 찾을 필요가 없고, 자성이 만법을 만들어내니 자성을 깨달으면 만법을 깨닫는 것이다. 견성(見性) 즉 자성만 깨달으면 그뿐, 달리 수행은 말하고 있지 않다. 이것이 돈교의 기본적 태도이다.

   의발을 물려받은 뒤에 혜능은 한동안 사냥꾼들을 따라서 숨어 살다가 광주(廣州)의 법성사(法性寺)에서 <열반경>을 강의하는 인종(印宗) 법사(法師)를 만나 자신이 의발을 물려받은 육조(六祖)임을 밝혔다. 그때에 인종이 오조는 어떤 법을 가르치느냐고 혜능에게 묻는데, 혜능은 말하기를 “다만 견성(見性)을 말할 뿐이고, 선정(禪定)과 해탈(解脫)은 말하지 않는다.”라고 한다. 인종이 왜 선정과 해탈을 말하지 않느냐고 묻자, 혜능은 “(선정과 해탈을 말하면) 이법(二法)이기 때문에 불법(佛法)이 아니다. 불법은 불이법(不二法)이다.”라고 말한다. 다시 인종이 불이법이 무엇이냐고 묻자 혜능은 “불성은 선하지도 않고 선하지 않지도 않으니, 이것을 일컬어 불이(不二)라고 한다. 오온(五蘊)과 십팔계(十八界)를 범부는 둘로 보지만, 지혜로운 자는 그 자성(自性)에 둘이 없음을 밝게 안다. 둘이 없는 자성(自性)이 곧 불성(佛性)이다.”라고 한다.

   자성은 둘이 없는 불이법이고, 불이법인 자성을 깨닫는 것이 돈교인 것이다. 세계의 모든 법의 자성은 둘이 없는 불이법이고, 세계의 온갖 법을 볼 때에 불이법으로 보는 것이 견성이다. 다만 언제나 어디서나 불이법을 보는 견성이 바로 돈교인 것이다. 불이이므로 당연히 선정을 닦아 해탈을 이룬다고 하지 않으며, 유루니 무루니 하고 나누지도 않으며, 유위니 무위니 하고 나누지도 않으며, 중생이니 부처니 하고 나누지도 않으며, 수행이니 깨달음이니 하고 나누지도 않는다. 언제나 모든 경우에 다만 둘로 분별됨이 없을 뿐이다. 그리하여 혜능은 이렇게 말한다.

“자성에는 잘못됨도 없고 어리석음도 없고 어지러움도 없다. 순간순간 반야로써 비추어보아 늘 법의 모습에서 벗어나 자유자재하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세울 무엇이 있겠는가? 자성을 스스로 깨달으면, 문득 깨닫고 문득 수행하니[돈오돈수(頓悟頓修)], 점차(漸次)는 없다. 그러므로 어떤 법도 세우지 않는 것이다. 모든 법이 적멸(寂滅)한데 어찌 점차 닦을 일이 있겠는가?”

   이처럼 돈교에선 문득 깨달음만 있을 뿐, 점진적인 수행은 없다. 문득 깨달아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들어가면, 만법을 대함에 언제나 불이법문 속에 있으니 늘 한결같고 차별이 없다. 그러므로 혜능은 이렇게 노래한다.

“바른 견해를 일러 출세간이라 하고,
삿된 견해를 일러 세간이라 한다.
삿됨과 바름을 모두 물리쳐 버리면,
깨달음의 본성은 완전하여 흠이 없다.
이 게송은 돈교(頓敎)이며,
또 큰 진리의 배라 부른다.
어리석게 들으면 오랜 세월이 걸리겠지만,
깨달으면 찰나 사이일 뿐이다.”
“지금 만약 돈교문(頓敎門)을 만난다면
문득 자성을 깨달아 세존(世尊)을 본다.
만약 수행을 하여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어느 곳에서 부처를 찾을 수 있겠는가?”


② 남돈북점(南頓北漸)

    육조의 문하는 남종(南宗)이라 하였고 신수의 문하는 북종(北宗)이라 하였는데, 육조 문하의 선은 돈교(頓敎)이고 신수 문하의 선은 점교(漸敎)라고 하였다. 점교는 점차로 한 단계 한 단계 닦아 나아가서 마침내 깨닫는다는 뜻이고, 돈교는 닦음과 깨달음이 문득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점교에선 한 단계 한 단계 점차로 닦아 나아가는 수행의 과정을 거쳐야 하고, 돈교에선 수행의 과정 없이 문득 깨달음을 이룬다. 점교에선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수행이 곧 참선(參禪)이지만, 돈교에선 수행이 따로 없고 평상심(平常心)이 곧 도(道)이고 깨달음이 곧 참선(參禪)이다.

   혜능 이전의 초조(初祖) 달마(達摩)에서 오조(五祖) 홍인(弘忍)까지의 중국의 선은 주로 좌선관행(坐禪觀行)의 수행을 말하는 점교(漸敎)였다. 좌선(坐禪)과 관법(觀法)을 통한 점수(漸修)를 말하는 북종 신수의 선은 이전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선정수행 없이 견성(見性)만 말하는 혜능의 돈교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선이다.

   혜능은 스스로 선정수행을 통하여 깨달은 것이 아니었다. 혜능은 처음 시장에서 나무를 팔다가 <금강경>의 구절을 듣고서 곧장 깨달았고, 뒤에 오조홍인의 <금강경> 설법(說法)을 듣고서 더욱 확실한 깨달음을 얻었다. 신수가 “그는 스승 없이 지혜를 얻어서 최상승의 진리를 깊이 깨달았으니, 나는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라고 말했듯이, 혜능은 스승인 오조의 법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깨달음에 의거한 법을 펼친 것이다. 오조홍인이 혜능을 인가한 까닭은 자신이 가르친 수행을 잘 실천해서가 아니라, 혜능이 법을 보는 안목이 바름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얻어 법을 보는 안목을 갖추지 못하면, 아무리 수행을 잘 하더라도 불법(佛法)은 아닌 것이다.

   <육조단경>을 통하여 북종의 가르침과 대비하여 혜능의 남종선(南宗禪)이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자. 신수의 선은 사조도신(四祖道信)과 오조홍인(五祖弘忍)의 동산법문(東山法門)의 선을 계승하였으므로, 신수가 말하는 선은 이전까지의 전통적인 선법(禪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에 반하여 혜능이 어떤 선을 말하는지를 살펴보면 혜능의 돈교법문(頓敎法門)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육조단경>에서 북종의 신수와 대비하여 혜능의 선을 말하는 부분은 대개 다음의 4가지이다.

㉮ 신수의 게송과 혜능의 게송
㉯ 인종 앞에서 견성을 말함
㉰ 지성의 질문에 답함
㉱ 설간의 질문에 답함


㉮ 신수의 게송과 혜능의 게송

   오조가 문인들에게 각자 자신의 공부를 내어 보여라고 하였을 때에 신수가 쓴 게송은 다음과 같다.

 “몸은 깨달음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다.
늘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먼지가 붙지 않도록 하라.”

   신수의 이 게송에 대하여 혜능이 쓴 게송은 다음과 같다.

 “깨달음에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도 대(臺)가 아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느 곳에 먼지가 붙겠는가?”

   이 두 게송의 차이는 앞 2구와 뒤 2구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앞 2구에서 신수는 깨달음의 열매가 열리는 나무로써 몸의 존재를 말하고, 밝은 거울과 같은 마음의 존재를 말했다. 반면에 혜능은 몸과 마음이라는 두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뒤 2구에서 신수는 늘 부지런히 닦아서 먼지가 붙지 않도록 하라고 하여 끊임없는 수행을 말했다. 반면에 혜능은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느 곳에 먼지가 붙겠는가라고 하여 수행을 부정하고 있다.

   마음이라는 존재를 인정함도 분별이요, 마음을 더럽히지 않고 깨끗이 하기 위하여 닦아야 한다는 것도 분별이다. 그러므로 신수는 분별 속에 있는 사람이다. 반면에 애초에 마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니 분별이 없고, 마음이 없으니 더럽거나 깨끗하다는 분별도 없다. 그러므로 혜능은 분별을 벗어나 있다. 분별 속에서 깨끗함과 더러움을 나누어 하나하나 닦아 나아가는 것이 신수의 점수(漸修)요, 애초에 분별이 없어서 곧장 아무 일도 없는 것이 혜능의 돈오(頓悟)이다.


㉯ 인종(仁宗) 앞에서 견성을 말함

   육조혜능이 오조홍인(五祖弘忍)에게 법을 전해 받고서 15년간 사냥꾼을 따라 숨어살다가 비로소 법을 펼치려고 광주(廣州) 법성사(法性寺)에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에, 법성사 주지인 인종(仁宗) 법사가 혜능을 알아보고서 물었다.

   “황매산의 오조(五祖)께서는 법을 부촉하실 때에 어떻게 가르쳐주십니까?”

   혜능이 말했다.
   “가르쳐 주시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견성(見性)을 말할 뿐이고, 선정(禪定)과 해탈(解脫)은 말하지 않습니다.”

   인종이 물었다.
   “왜 선정과 해탈을 말하지 않습니까?”

   혜능이 말했다.
   “이법(二法)이기 때문에 불법(佛法)이 아닙니다. 불법은 불이법(不二法)입니다.”

   인종 법사가 또 물었다.
   “어떤 것이 불법(佛法)이 불이법이라는 것입니까?”

   혜능이 말했다.
   “법사께서 <열반경>을 강설하시면서 밝게 불성(佛性)을 보시는 것이 곧 불법이 불이법인 것입니다. … 불성은 선하지도 않고 선하지 않지도 않으니, 이것을 일컬어 불이(不二)라고 합니다. 오온(五蘊)과 십팔계(十八界)를 범부는 둘로 보지만, 지혜로운 자는 그 자성(自性)에 둘이 없음을 밝게 압니다. 둘이 없는 자성(自性)이 곧 불성(佛性)입니다.”
   “다만 견성(見性)을 말할 뿐이고, 선정(禪定)과 해탈(解脫)은 말하지 않는다.”라 하고, 그 까닭을 묻는 질문에 “선정과 해탈은 이법(二法)이기 때문에 불법(佛法)이 아니다. 불법은 불이법(不二法)이다.”라 하고, 또 “밝게 불성(佛性)을 보는 것이 곧 불법이 불이법인 것이다.”라 하고, 또 “둘이 없는 자성(自性)이 곧 불성(佛性)이다.”라고 하였다. 혜능의 이 말은 곧 혜능이 확립한 남종선(南宗禪)의 성격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혜능이 말하는 요점은 다음 두 가지이다.

   첫째, 다만 견성(見性), 즉 불이법(不二法)인 불성(佛性)을 보는 깨달음을 말할 뿐이다.

   둘째, 불법(佛法)은 불이법이고, 이법(二法)은 불법이 아니다.

   <육조단경> 전체의 내용이 단지 이 두 가지 주제를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혜능은 오직 견성(見性)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불성(佛性), 자성(自性), 본성(本性)은 불이중도(不二中道)의 다른 이름이고, 선(禪)은 불이중도를 깨달아 언제나 불이중도의 눈을 가지고 삼라만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선정(禪定), 해탈(解脫), 열반(涅槃), 반야(般若), 보리(菩提) 등 불교의 모든 용어들은 단지 불이중도인 견성을 다양한 측면에서 말하는 것일 뿐, 제각각 차별되는 이름의 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불이중도인 견성이 있을 뿐이다.

   어떤 이름이나 어떤 일이라고 하더라도 분별되는 상(相)을 따라 다르게 본다면 이법(二法)으로서 견성이 아니고 불법이 아니다. 선(禪)은 언제나 어디서나 단지 불이법인 불성을 보는 견성을 말할 뿐이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하듯이 견성은 곧 깨달음이다. 선은 단지 깨달음을 말할 뿐인 것이다. 이것은 선의 단적인 특징을 말하고 있다. 선은 모든 차별을 당장 적멸해 버리고 다만 불이법인 깨달음을 말할 뿐이다.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단지 불이법인 법성(法性)을 볼 뿐이다. 선정수행과 해탈을 말하지 않고, 유위(有爲)니 무위(無爲)니 유루(有漏)니 무루(無漏)니 하는 여러 가지 차별을 말하지 않고 곧장 둘 아닌 불성을 말할 뿐이다.

   이처럼 혜능의 선은 깨달은 자의 입장에서 깨달은 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계를 말할 뿐이다. 깨달은 자에게는 자신과 세계가 둘이 아니고, 안과 밖이 차별되지 않고 하나이다. 세계가 곧 자기자신이고, 마음이 곧 세계이다. 온갖 차별되는 모습들이 그대로 차별 없는 하나이고, 차별 없는 하나가 그대로 삼라만상의 세계이다. 한 물건도 법이라거나 마음이라고 할 것이 없으니, 차별되는 모습에서 벗어나 불이중도를 실현했기 때문이다. <육조단경>에 실린 혜능의 말에는 다양한 불교의 일들에서 오로지 불이중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혜능의 깨달음이 일관되게 드러나 있다. 남종돈교에선 단지 견성을 말할 뿐이다.


㉰ 지성(志誠)의 질문에 답함

   <단경>에는 북종 신수가 파견한 지성(志誠)과 혜능의 대화가 나온다. 여기에서 혜능은 북종과는 다른 남종의 돈교법문을 자세히 말하고 있다.

    육조(六祖)가 북종(北宗) 신수(神秀)의 제자인 지성(志誠)에게 물었다.
    “너의 스승은 어떻게 대중에게 법을 보여주느냐?”

   지성이 말했다.
   “늘 대중에게 가르치시길, ‘마음을 쉬어 깨끗함을 보고,[주심관정(住心觀淨)] 오래 앉아서 눕지 말라.’[장좌불와(長坐不臥)]라고 하십니다.”

   육조가 말했다.
   “마음을 쉬어 깨끗함을 보는 것은 병(病)이지 선(禪)이 아니다. 늘 앉아서 몸을 구속하면 도리(道理)에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나의 게송을 들어라.”

 “살아 있을 때에는 앉아서 눕지 못하고
죽어서는 누워서 앉지를 못하네.
더러운 냄새나는 육신을 한결같이 붙잡고서
어떻게 공부가 되겠는가?”

   지성은 북종의 가르침은 ‘마음을 쉬어 깨끗함을 보고,[주심관정(住心觀淨)] 오래 앉아서 눕지 말라.’[장좌불와(長坐不臥)]는 말로써 요약하고 있다. 오래 앉아서 눕지 않는 장좌불와란 곧 좌선(坐禪)이고, 좌선 속에서 행하는 마음 공부는 마음의 잡념을 쉬고 텅 비고 깨끗한 마음을 보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혜능은 말하길 “마음을 쉬어 깨끗함을 보는 것은 병(病)이지 선(禪)이 아니다. 늘 앉아서 몸을 구속하면 도리(道理)에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라고 하고서, 육체를 붙잡고 앉아서 눕지 않는 것을 공부로 삼는 것을 통렬하게 비난하고 있다. 좌선(坐禪)하여 관심(觀心)하는 것을 선(禪)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육조는 신수대사가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어떻게 가르치는가 하고 물었다.

   지성(志誠)이 말했다.

   “신수대사께서는 모든 악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을 계(戒)라 하시고, 모든 선한 일을 받들어 행하는 것을 혜(慧)라 하시고, 스스로 그 뜻을 깨끗하게 하는 것을 정(定)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분의 말씀은 이와 같습니다만, 스님께서는 어떠한 법을 가지고 사람을 깨우쳐주십니까?”

   육조가 말했다.

   “내가 만약에 사람에게 줄 법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너를 속이는 것이다. 다만 경우에 따라서 얽매인 것을 알맞게 풀어주는 것을 거짓 이름하여 삼매(三昧)라고 한다. 너의 스승이 말하는 바와 같은 그런 계․정․혜는 진실로 알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보는 바의 계․정․혜는 그와는 다르다.”

   신수는 계정혜를 과거칠불(過去七佛)이 불교의 요점을 공통으로 말했다고 하는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를 빌어서 말했다. 그런데 악한 행동을 하지 않고, 선한 행동을 하고, 생각을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모두 이분법 속에서 취하고 버리는 유위의 행위이고 조작하여 무엇을 이루려는 행위이다.

   이에 대하여 혜능은 매우 다른 말을 하고 있다. 사람에게 줄 만한 법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을 그 사람을 속이는 짓이다. 혜능은 주고 받을 것이 없고, 얻고 잃을 것이 없는 불이법(不二法)을 말하고 있다. 혜능은 다시 말하기를, “경우에 따라서 얽매인 것을 알맞게 풀어주는 것을 거짓 이름하여 삼매(三昧)라고 한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모든 불교의 가르침이 어리석은 분별과 집착에서 풀어주는 방편임을 말한 것이다.

   신수에게는 불교라는 이름의 견해를 가지고 불교다운 행위를 행하는 유위의 행동이 불교이지만, 혜능에게는 불교의 말과 행위가 모두 우리의 어리석음을 치유하는 약으로서 임시로 거짓 만들어 놓은 방편일 뿐인 것이다. 다들 불교를 방편이라고 하지만, 불교를 방편으로 보는 눈이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신수에게 불교라는 방편은 무언가를 세우고 만드는 방편이라면, 혜능에게 불교라는 방편은 다만 우리로 하여금 망상(妄相)의 꿈에서 깨어나게 하는 수단일 뿐이다. 얽매인 것을 풀어주는 일이 중요하지, 거짓으로 만든 이름인 삼매(三昧)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병을 치유하는 효험이 중요하지 약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선에서는 사람을 일깨워줌에 전통적인 불교의 말과 방식을 고집하지 않는다. 선(禪)을 격외선(格外禪)이라고 하듯이, 분별망상에서 풀어주는 방편을 상대에 알맞게 어떤 격식에도 구애됨 없이 자유자재하게 사용하는 것이 불교와는 다른 선의 특징이다.

   지성이 말했다.

   “계·정·혜는 다만 한 종류가 있을 뿐인데, 어떻게 또 다른 종류가 있겠습니까?”

   육조가 말했다.

   “너의 스승이 말하는 계․정․혜는 대승(大乘)의 사람들을 교화하는 것이고, 내가 말하는 계․정․혜는 최상승(最上乘)의 사람들을 교화하는 것이다. 깨달음이 같지 않고, 자성을 보는 것에도 빠르고 늦음이 있다. 너는 내 말을 들어라. 같고 다름을 말해주겠다. 내가 말하는 법은 자성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본바탕에서 벗어나 법을 말하는 것을 일러 모습을 말한다고 하니, 자성에는 늘 어둡다. 모름지기 온갖 법들이 전부 자성에서 일어나 활동함을 아는 것이 바로 참된 계․정․혜의 법이다.”

  신수가 말하는 계정혜는 대승의 사람들을 향한 것이고, 혜능이 말하는 계정혜는 최상승의 사람들을 향한 것이다. 대승의 사람과 최상승의 사람은 깨달음이 다르고 견성함에 늦고 빠름이 있다. 즉, 최상승 사람의 깨달음이 대승 사람보다 더 뛰어나고, 최상승 사람의 견성이 대승 사람보다 더 빠르다. 왜 이런 말을 할까? 신수가 말하는 깨달음과 견성은 점차적인 수행의 과정을 겪은 뒤에 얻을 목표이고, 혜능이 말하는 깨달음과 견성은 지금 바로 여기에서 즉각 분별심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점수(漸修)와 돈오(頓悟)의 차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혜능은 다시 “내가 말하는 법은 자성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하여, 스스로 언제나 불이법인 자성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법의 모습을 말하면 자성에는 늘 어둡다고 하였는데, 법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 곧 분별이요 망상이다. 결국 혜능의 말은 계정혜라는 어떤 정해진 불법(佛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불이법인 자성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곧 모든 불법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언제 어디서나 단지 불이중도인 견성이 선이다. 선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불이중도인 깨달음뿐이어서, 분별에 치우쳐 머물러 있는 사람을 언제나 분별에서 풀어내어 중도로 이끌어주는 것이 곧 선의 가르침이다.

   다시 지성에게 말했다.

   “네 스승이 말하는 계․정․혜는 작은 근기의 지혜를 자진 사람에게 권할 만한 것이고, 내가 말하는 계․정․혜는 큰 근기의 지혜를 가진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다. 만약 자성을 깨닫는다면, 보리열반(菩提涅槃)도 세우지 않고 해탈지견(解脫知見)도 세우지 않는다. 얻을 만한 하나의 법도 없어야, 바야흐로 만법을 건립할 수 있다. 만약 이 뜻을 이해한다면, 불신(佛身)이라고도 말하고, 보리열반이라고도 말하고, 해탈지견이라고도 말한다. 견성한 사람은 세울 수도 있고 세우지 않을 수도 있으니, 가고 옴에 자유로와 머묾이 없고 장애가 없다. 인연에 응하여 행동하고, 말에 따라서 답을 하며, 온갖 조화를 두루 보면서도 자성을 떠나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자재신통유희삼매(自在神通遊戱三昧)를 얻은 것이니, 이름하여 견성(見性)이라 한다.”

   자성을 깨달으면 어떤 법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어떤 법이든 자유자재하게 세울 수도 있고 부술 수도 있지만, 본래 하나의 법도 없다. 하나의 법도 없으면서, 온갖 법을 세우기도 하고 부수기도 한다. 이러한 자유자재가 자성을 떠나지 않는 견성이요 불이중도이다. 온갖 경계 속에서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자재한 것이 바로 선이다. 선은 경계에 얽매인 사람을 풀어주어 자유롭게 하는 것이지, 경계를 세워 사람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다.

   지성이 거듭 육조에게 여쭈었다.

   “어떤 것이 뜻을 세우지 않는 것입니까?”

   육조가 말했다.

   “자성에는 잘못됨도 없고 어리석음도 없고 어지러움도 없다. 순간순간 반야로써 비추어보아 늘 법의 모습에서 벗어나 자유자재하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세울 무엇이 있겠는가? 자성을 스스로 깨달으면, 문득 깨닫고 문득 수행하니[돈오돈수(頓悟頓修)], 점차(漸次)는 없다. 그러므로 어떤 법도 세우지 않는 것이다. 모든 법이 적멸(寂滅)한데 어찌 점차 닦을 일이 있겠는가?”

   우리의 자성은 본래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므로 자성을 스스로 깨닫기만 하면 그뿐, 다시 점차로 수행할 것은 없다. 문득 깨닫고 문득 수행하여 한 순간 본래면목을 보면 그뿐이다. 본래 자성에는 얻을 수 있는 한 개의 법도 없다. 자성은 불이중도이니 모든 분별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모든 분별에서 벗어난 적멸(寂滅)에서 어찌 점차로 닦아 나아가는 단계가 있겠는가? 이처럼 혜능의 돈교법문(頓敎法門)은 돈오돈수(頓悟頓修)이다. 한 순간 문득 깨달으면 바로 완전한 자성인 것이다.


㉱ 설간(薛簡)의 질문에 답함

   설간(薛簡)이 말했다.

  “서울에 있는 선승(禪僧)들은 모두 말하기를 ‘도를 알려고 한다면 반드시 좌선(坐禪)하여 선정(禪定)을 익혀야 한다. 선정으로 말미암지 않고 해탈을 얻은 자는 아직 없었다.’라고 하는데,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법은 어떻습니까?”

   혜능이 말했다.

   “도는 마음으로부터 깨닫는 것인데, 어찌 앉는 것에 있겠습니까? 경전에서 말했습니다. ‘만약 여래가 앉거나 눕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삿된 도(道)를 행하는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여래는)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기 때문이다.’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이 여래의 깨끗한 선(禪)이요, 모든 법이 텅 비어 고요한 것이 여래의 깨끗한 좌(坐)입니다. 결국 깨달음도 없는데, 하물며 앉겠습니까?”

   설간은 당나라의 서울인 장안(長安)에서 황제의 명을 받고 혜능을 찾아와 법을 물었다. 북쪽 장안의 선사들은 국사(國師)인 대통신수(大通神秀)의 제자들일 것이다. 설간은 장안에 있는 선사들의 주장을 ‘깨달으려면 반드시 좌선하여 선정을 익혀야 하니, 선정으로 말미암아 해탈을 얻는다.’라고 요약하여 말했다. 이 말은 북종의 선을 나타낸다. 이에 대하여 혜능은 ‘도는 마음에서 깨달으니 몸이 앉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라고 말하여 좌선선정을 부정하고는, 생겨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것이 선이고 텅비고 고요하여 한 물건도 없는 것이 좌라고 하는데, 이것은 곧 불이법문(不二法門)이 좌선이요 선정이라는 말이다.

   설간이 말했다.

   “제가 서울로 돌아가면 임금께서 반드시 물으실 것입니다. 원컨대 스님께서는 자비를 베풀어 마음의 요체를 가르쳐주십시오. 두 황궁과 서울에서 도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전하겠습니다. 비유하면 하나의 등불이 수만 개의 등에 불을 붙이면, 모두 밝아져서 밝음이 끝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육조가 말했다.

   “도에는 밝고 어두움이 없습니다. 밝고 어두움은 서로 상대(相對)하는 뜻입니다. 밝고 밝아 끝이 없다는 것 역시 끝이 있습니다. 상대하여 세운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유마경(淨名經)>에 이르기를 ‘법은 비교할 것이 없으니,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설간이 혜능의 도를 묻자, 혜능은 말하기를 도(道)란 다만 서로 상대가 없는 불이법(不二法)일 뿐이라고 했다.

   설간이 말했다.

   “밝음은 지혜를 비유하고, 어둠은 번뇌를 비유하는 것입니다. 도 닦는 사람이 만약 지혜로써 번뇌를 비추어 부수지 않는다면, 끝없는 생사윤회에서 무엇에 의지하여 벗어나겠습니까?”

   혜능이 말했다.

   “번뇌가 곧 깨달음이며, 둘이 없고 다름이 없습니다. 만약 지혜로써 번뇌를 비추어 부순다고 한다면, 이것은 이승(二乘)의 견해로서 양이나 염소 등의 근기입니다. 지혜가 뛰어난 대근기라면, 전혀 이와 같지 않습니다.”

   설간이 말했다.

   “어떤 것이 대승의 견해입니까?”

   혜능이 말했다.

  “밝음과 밝지 않음을 범부는 둘로 보지만, 지혜로운 자는 그 자성에 둘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둘 없는 자성이 바로 진실한 자성입니다. 진실한 자성은 어리석은 범부라고 줄어들지도 않고 현명한 성인이라고 불어나지도 않으며, 번뇌 속에서도 어지럽지 않고 선정 속에서도 고요하지 않습니다. 끊어지지도 않고 이어지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중간에 있지도 않고 안팎에 있지도 않으며,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습니다. 자성과 모습이 한결같아 늘 머물러 변하지 않음을 이름하여 도(道)라고 합니다.”

   밝은 지혜로써 어두운 번뇌를 부순다고 한다면, 이것은 분별 속의 말이고 불이중도의 말이 아니다. 범부와 소승(小乘)은 분별 속에 있지만, 대승(大乘)은 불이중도에 있다. 대승의 법은 언제나 불이법이다. 불이법이 참된 자성이다. 자성은 불이법이므로, 자성에는 번뇌와 해탈의 다름이 없고, 범부와 부처의 다름이 없고, 선정이 따로 없고, 안팎이 없고, 오고감이 없고, 생기고 사라짐이 없이 늘 한결같다.


③ 수행에 대한 혜능의 언급

    <육조단경>에서 수행에 대한 혜능의 언급을 살펴보면, 혜능은 모든 수행에 대하여 언제나 불이법문인 견성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단계적인 수행은 없고, 언제나 불이법문인 견성(見性)이 있을 뿐이다.

   ㉮ 좌선선정이 아니라 견성이다

   “무엇을 일러 좌선(坐禪)이라 할까요? 이 법문(法門) 속에서 장애가 없어, 밖으로 모든 좋고 나쁜 경계에서 마음에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일러 좌(坐)라고 하고, 안으로 자성(自性)을 보아 움직임이 없는 것을 일러 선(禪)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무엇을 일러 선정(禪定)이라 할까요? 밖으로 분별된 모습을 벗어나는 것이 선(禪)이고, 안으로 어지럽지 않은 것이 정(定)입니다.”

   “밖으로 모습에 집착하면 안의 마음이 어지럽고, 밖으로 만약 모습을 벗어나면 마음이 어지럽지 않습니다. 본성(本性)은 스스로 깨끗하고 스스로 안정되어 있으나, 단지 경계를 보고 경계를 생각하기 때문에 어지럽습니다. 만약 온갖 경계를 보고서도 마음이 어지럽지 않다면, 바로 참된 정(定)입니다. 여러분, 밖으로 모습을 벗어나는 것이 선(禪)이고, 안으로 어지럽지 않은 것이 정(定)이니, 밖으로 선(禪)하고 안으로 정(定)하면 곧 선정(禪定)이 됩니다. <유마경(維摩經)>에서는 ‘곧장 활짝 열려서 본심을 되찾는다.’라고 하였고, <보살계경(菩薩戒經)>에 이르기를 ‘내가 본래 타고난 자성은 깨끗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매 순간 저절로 본성이 깨끗함을 보면, 저절로 닦고 저절로 행하여 저절로 불도(佛道)가 이루어집니다.”

<요약>

   좌선(坐禪)에서 좌(坐)는 밖으로 온갖 경계를 만나 분별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고, 선(禪)은 안으로 불이의 자성을 보아 흔들림이 없는 것이다. 선정(禪定)에서 선(禪)은 밖으로 분별된 모습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정(定)은 안으로 어지럽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선(禪)이 좌(坐)이고 선이 정(定)이다. 온갖 분별된 경계에서 끄달림이 없는 것은 곧 늘 불이의 중도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좌선이든 선정이든 다만 견성(見性)일 뿐이다.


   “우리 선문(禪門)의 좌선(坐禪)은 원래 마음에 집착하지도 않고, 깨끗함에 집착하지도 않고, 움직이지 않는 것을 옳다고 여기지도 않습니다. 만약 마음에 집착한다고 하면, 마음은 원래 허망한 것입니다. 마음이 환상과 같음을 알기 때문에 집착할 것이 없습니다. 만약 깨끗함에 집착한다고 하면, 사람의 본성은 본래 깨끗합니다. 허망한 생각 때문에 진여(眞如)를 뒤덮은 것이니, 단지 허망한 생각만 없으면 본성은 원래 깨끗합니다. 일부러 마음을 일으켜 깨끗함에 집착하여 도리어 깨끗하다는 망상(妄想)을 내지만, 망상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집착 역시 허망합니다. 깨끗함에는 모습이 없는데 도리어 깨끗하다는 모습을 세워 그것을 공부라고 말하지만, 이러한 견해를 낸다면 자기의 본성을 가로막고 도리어 깨끗함에 얽매이게 됩니다. 도반들이여! 만약 움직이지 않음을 닦는 자가 다만 모든 사람을 만날 때에 그 사람의 옳음․그름․좋음․나쁨․허물․어려움을 보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자성이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도반들이여! 어리석은 사람은 몸은 비록 움직이지 않으나, 입만 열면 곧 다른 사람의 옳음․그름․장점․단점․좋음․싫음을 말하니 도(道)와는 어긋나는 것입니다. 만약에 마음에 집착하고 깨끗함에 집착한다면, 도리어 도를 가로막는 것입니다.”

<요약>

선문(禪門)의 좌선(坐禪)은 마음에 집착하지도 않고, 깨끗함에 집착하지도 않고, 움직이지 않는 것을 옳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마음은 환상과 같아서 집착할 것이 없다. 본성은 본래 깨끗하니, 마음을 일으켜 깨끗함에 집착하면 도리어 깨끗하다는 망상(妄相)을 만드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몸이 아니라, 경계를 만나서 분별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선을 공부하는 지황(智隍)이라는 사람은 처음에 오조(五祖)를 찾아뵙고 공부하였는데, 스스로 이미 삼매(三昧)를 얻었다고 여기고서 암자에 머물며 앉아서 눕지 않고 20년을 지냈다. 혜능의 제자인 현책(玄策)이 돌아다니다가 하삭(河朔)에 이르러 지황의 이름을 듣고서 암자로 찾아가서 물었다.

   “당신은 여기에서 무엇을 합니까?”

   지황이 말했다.

   “선정(禪定)에 들어갑니다.”

   현책이 말했다.

   “당신이 선정에 들어간다고 말하니, 마음이 있어서 들어가는 것입니까? 마음이 없어서 들어가는 것입니까? 만약에 마음이 없어서 들어간다면, 모든 정식(情識) 없는 풀․나무․기와․돌들도 마땅히 선정을 얻어야할 것입니다. 만약 마음이 있어서 들어간다면, 모든 정식을 가진 존재들 역시 마땅히 선정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지황이 말했다.

   “내가 선정에 들어갈 때에는 있느니 없느니 하는 그런 마음을 보지 않습니다.”

   현책이 말했다

  “있느니 없느니 하는 그런 마음이 있음을 보지 않는다면 곧 늘 선정인데, 어떻게 들어가고 나옴이 있겠습니까? 만약 들어가고 나옴이 있다면, 선정이 아닙니다.”

<요약>

선정(禪定)에는 들어가거나 나오거나 하는 일이 없다. 선정으로 들어가거나 선정에서 나온다면 참된 선정이 아니다. 참된 선정은 곧 불이중도(不二中道)이니 들어가거나 나오는 일이 없다.


   ㉯ 삼매(三昧)는 좌선이 아니다

   “도반들이여, 일행삼매(一行三昧)라는 것은 모든 곳에서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항상 하나의 직심(直心)을 행하는 것입니다. <유마경>에 말하기를 ‘직심(直心)이 도량이고, 직심(直心)이 정토이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 다만 직심(直心)만 행할 뿐, 어떤 법에도 집착하지 마십시오. 어리석은 사람은 법의 모습에 집착하여 일행삼매를 가지고 말하기를, ‘앉아서 움직이지 않고 망령되이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곧 일행삼매이다.’라고 곧장 말합니다.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무정물과 같게 되어서 도리어 도를 가로막는 원인이 됩니다. 도반들이여, 도는 모름지기 통하여 흘러야 하는데, 어찌하여 도리어 막히겠습니까? 마음이 법에 머물지 않으면 도는 통하여 흐르고, 마음이 만약 법에 머물면 이름하여 스스로를 얽어맨다고 합니다. 만약 늘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옳다고 한다면, 마치 사리불(舍利弗)이 숲 속에 편안히 앉아 있다가 도리어 유마힐(維摩詰)에게 꾸중을 들은 것과 같을 뿐입니다.”

<요약>

삼매(三昧)는 앉아서 움직이지 않고 망령되이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만 늘 하나의 직심(直心)을 행하는 것이다. 앉아서 움직이지 않고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무정물(無情物)과 같게 되어서 도리어 도(道)를 가로막는다.


   ㉰ 공심정좌(空心靜坐)는 잘못이다

   “도반들이여, 내가 공(空)을 말하는 것을 듣고서 곧장 공(空)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도 공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마음을 비우고 고요히 앉아 있다면, 이것은 곧 무기공(無記空)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어떤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을 비우고 고요히 앉아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을 스스로 일러 크다고 말하지만, 이러한 무리는 더불어 말할 만하지 못하니 삿된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법에는 둘이 없고, 마음 역시 그러합니다. 도는 깨끗하여 여러 모습이 없습니다. 그대들은 삼가 고요함을 보지도 말고, 그 마음을 비우지도 마십시오. 이 마음은 본래 깨끗하여 취하거나 버릴 수 없습니다.”

   “너는 다만 마음이 허공과 같되 허공이라는 견해에 집착하지 않아야 응용(應用)에 장애가 없다. 움직일 때에나 고요히 있을 때에나 마음이 없어서 범인이니 성인이니 하는 생각을 잊고, 주관과 객관이 함께 사라져서 자성과 모습이 한결같으면, 선정이 아닌 때가 없다.”

<요약>

마음을 비우고 고요히 앉아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것이다. 마음은 본래 모습이 없으므로, 취하거나 버릴 수 없고, 채우거나 비울 수 없고, 시끄럽거나 고요할 수 없다. 


   ㉱ 좌선간심(坐禪看心)은 잘못이다

   “도반들이여, 또 어떤 사람은 앉아서 마음을 보고 고요함을 관찰하면서 움직이지도 말고 일어나지도 말지니 이로 말미암아 공부가 이루어진다고 가르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고 곧바로 집착하여 거꾸로 뒤집어집니다. 이와 같은 자가 많아서 이와 같이 서로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큰 잘못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약>

앉아서 마음을 보고 고요함을 관찰하면서 움직이지도 않고 일어나지도 않는 것은 올바른 공부가 아니라 큰 잘못이다.


   ㉲점차 수행함은 없다

   “깨달음인 자성은 본래 깨끗하니, 단지 이 마음을 쓰기만 하면 곧장 깨달음을 이룹니다.”

   “어찌 자성이 본래 깨끗함을 기대했겠습니까? 어찌 자성이 본래 생멸(生滅)하지 않음을 기대했겠습니까? 어찌 자성이 본래 완전히 갖추어져 있음을 기대했겠습니까? 어찌 자성이 본래 흔들리지 않음을 기대했겠습니까? 어찌 자성이 만법(萬法)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기대했겠습니까?”

   “자성에는 잘못도 없고 어리석음도 없고 혼란도 없다. 순간순간 반야로써 비추어보아 늘 법의 모습에서 벗어나 자유자재하고 종횡무진할 수 있다면, 세울 무엇이 있겠는가? 자성이 스스로 깨달으면, 문득 깨닫고 문득 수행하고, 또한 점차(漸次)가 없다. 그러므로 어떤 법도 세우지 않는 것이다. 모든 법이 적멸(寂滅)한데, 무슨 차례가 있겠는가?”

   “반야의 지혜 역시 크고 작음이 없지만, 모든 중생 스스로의 마음이 어리석음과 깨달음으로 같지 않기 때문에, 어리석은 마음은 밖을 보고 수행하여 깨달음을 찾으나, 자성(自性)을 깨닫지 못한다면 근기가 작은 것입니다. 만약 돈교(頓敎)를 깨닫고 바깥으로 수행하는 것에 집착하지 않으며, 다만 자기 마음에서 늘 바른 견해를 일으키고 피곤한 번뇌에 늘 물들지 않을 수 있다면, 곧 견성(見性)입니다.”

<요약>

자성은 본래 완전하여 아무런 모자람이 없으니 문득 자성을 깨달으면 그뿐, 점차로 차례차례 수행하여 나아갈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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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조도일(馬祖道一)은 당(唐)나라 개원(開元) 년간(年間; 713-741)에 형악(衡嶽)의 전법원(傳法院)에서 선정(禪定)을 익히다가 회양(懷讓) 화상을 만났다. 회양은 도일(道一)이 진리를 담을 만한 그릇이 됨을 알아보고는 물었다.

   “대덕(大德)은 좌선(坐禪)하여 무엇을 하려 하시오?”

   도일이 말했다.

   “부처가 되려고 합니다.”

   회양은 이에 벽돌 한 개를 가져와 그 암자 앞에서 갈기 시작했다. 이것을 보고 도일이 물었다.

   “벽돌을 갈아서 어쩌려 하십니까?”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 하오.”

   “벽돌을 간다고 어떻게 거울이 되겠습니까?”

   “벽돌을 갈아 거울이 되지 못한다면, 좌선하여 어떻게 부처가 되겠는가?”

   이에 도일이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소수레가 가지 않는다면 수레를 때려야 하겠는가, 소를 때려야 하겠는가?”

   도일이 대답이 없자, 회양이 다시 말했다.

   “그대는 좌선을 배우고자 하는가, 좌불(坐佛)을 배우고자 하는가? 만약 좌선을 배우고자 한다면 선(禪)은 앉거나 눕는 것이 아니며, 좌불을 배우고자 한다면 부처는 정해진 모습이 아니다. 머묾 없는 법에서는 취하거나 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대가 좌불을 따른다면 곧 부처를 죽이는 것이니, 만약 앉은 모습에 집착한다면 그 이치에 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약>

선(禪)은 앉거나 눕는 모습이 아니다. 앉은 모습에 집착하면 깨달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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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도는 닦는 것이 아니다

   어떤 스님이 물었다.

   “도(道)를 닦는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마조가 답했다.

   “도는 닦는 것에 속하지 않는다. 만약 닦을 수 있다고 한다면, 닦아서 이루어지는 것은 다시 부서지니 곧 성문(聲聞)과 같아지며, 만약 닦지 않는다고 한다면, 곧 범부(凡夫)와 같아진다.”


② 수행은 조작이다

   “자성은 본래부터 완전하여 모자람이 없다. 그러므로 다만 선이니 악이니 하는 일에 머물지 않기만 하면, 도 닦는 사람이라 할 것이다. 선에 머물고 악을 제거하며, 공(空)을 관(觀)하고 선정(禪定)에 들어가는 것 등은 곧 조작(造作)에 속한다. 만약 다시 밖으로 치달려 구한다면 더욱더 멀어질 뿐이다.”


③ 수행하여 깨닫는 것이 아니다

   “성문은, 성인(聖人)의 마음에는 본래 지위(地位)․인과(因果)․계급(階級)이 없다는 것을 모르고, 마음으로 헤아려 허망한 생각을 하여 원인을 닦아 결과를 얻으려 한다. 마음을 비우는 선정에 머물러 긴긴 시간을 지나면, 비록 깨닫는다고 하여도 깨닫고 나서 다시 미혹해진다. 모든 보살(菩薩)이 이러한 성문을 마치 지옥의 고통과 같이 여기는 것은, 성문이 이처럼 공(空)에 빠지고 고요함에 머물러서 불성(佛性)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장맛비가 지나 불 꺼진 재에 불씨가 남아 있지 않은 것은, 비유하면 성문이 망령되이 닦음에 근거하여 깨달음을 얻으려는 것과 같다.”


④ 닦는 것이 도리어 더럽히는 것이다

   “도는 닦을 필요가 없다. 다만 더럽히지만 말라. 어떤 것이 더럽히는 것인가? 분별하는 마음으로써 조작하고 추구하는 것들이 바로 더럽히는 것이다.”


⑤ 수도와 좌선에 의지하지 않는다

   “본래 있는 것이 지금 있으니, 수도(修道)나 좌선(坐禪)에 의지하지 않는다. 수도도 하지 않고 좌선도 하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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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수행할 필요 없다

   “이 마음이 곧 부처이니, 부처가 곧 중생이다. 중생일 때에도 이 마음은 줄어들지 않고, 부처일 때에도 이 마음은 불어나지 않는다. 나아가 육도만행(六度萬行)과 강바닥 모래알 같이 많은 공덕을 본래 다 갖추고 있으니 수행에 의지하여 더할 필요가 없으며, 인연을 만나면 베풀고 인연이 사라지면 고요히 쉰다. 만약 이것이 부처임을 확실히 믿지 못하고, 모습에 집착하여 수행함으로써 효과를 바란다면, 모두 망상(妄想)이어서 도와는 어긋난다.”

   “깨달음은 마음에 있고, 육도만행과는 관계가 없다. 육도만행은 모두 방편문(方便門)에서 중생을 교화 제도하는 쪽의 일이다. 설사 보리(菩提)․진여(眞如)․실제(實際)․해탈(解脫)․법신(法身)과 곧바로 십지(十地)․사과(四果)라는 성인의 지위에 도달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모두가 중생을 제도하는 방편문일 뿐, 부처인 마음과는 관계가 없다. 마음이 곧 부처이다.”

   “마음이 곧 부처이다. 위로는 모든 부처에 이르고 아래로는 꿈틀거리는 벌레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성이 있으며, 동일한 마음 바탕이다. 그러므로 달마(達摩)는 인도로부터 와서 한 개 마음의 법을 오직 전함에, 모든 중생이 본래 부처임을 곧장 가리켰으니 수행할 필요가 없다. 다만 지금 자기 마음을 알기만 하면, 자기 본성을 보니, 다시 따로 구하지 말라.”

   “만약 불도(佛道)가 배우고 닦아서 얻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러한 견해는 전혀 맞지 않다.”

<요약>

마음에는 본래 모든 것들이 다 갖추어져 있으므로 수행에 의지하여 더할 필요가 없다. 모습에 집착하여 수행함으로써 효과를 바란다면 모두 망상(妄想)이다. 깨달음은 배우고 닦아서 얻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바로 이 마음이다.


② 깨달음에는 차례가 없다

   “이 마음이 곧 부처이니, 결코 다른 부처가 없고 또한 다른 마음도 없다. 이 마음은 밝고 맑아서 마치 허공과 같아 한 점의 모습도 없다.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이면 법의 바탕과 어긋나고 모습을 붙잡게 되지만, 애초부터 모습을 붙잡는 부처는 없다. 육도만행(六度萬行)을 닦아 부처가 되려고 한다면 차례가 있게 되지만, 애초부터 차례가 있는 부처는 없다. 단지 한 개 마음을 깨달을 뿐, 얻을 수 있는 법은 전혀 없다. 이 한 개 마음이 참된 부처이니, 부처와 중생은 한 개 마음으로서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조사(祖師)는 모든 중생의 본래 마음을 곧장 가리켰던 것이니, 마음의 본바탕이 본래 부처이니, 수행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단계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며, 밝거나 어두운 것도 아니다. 밝음이 아니기 때문에 밝음이 없고, 어둠이 아니기 때문에 어둠이 없다. 그러므로 무명(無明)도 없고 무명이 다함도 없다.”

<요약>

수행에는 차례가 있지만 깨달음에는 차례가 없으므로, 차례 있는 수행은 깨달음이 아니다.


③ 수행은 모습에 집착하는 것이다

   “오직 이 한 개 마음뿐, 얻을 수 있는 법은 티끌만큼도 없다. 바로 이 마음이 부처이다. 오늘날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이 마음의 본바탕을 깨닫지는 못하고 곧장 마음 위에서 마음을 내니, 밖에서 부처를 구하는 것이고 모습을 붙잡고 수행하는 것이므로, 모두가 악법(惡法)이고 깨달음이 아니다.”

<요약>

수행이란 마음 위에서 마음을 내는 것이고, 모습에 집착하여 밖으로 부처를 구하는 것이므로, 악법(惡法)이지 깨달음이 아니다.


④ 수행은 조작하는 것이다

   “이 마음이 곧 부처이고, 마음이 없는 것이 곧 도이다. 다만 마음을 일으키지도 생각을 움직이지도 않으면, 있고 없음․길고 짧음․남과 나․주관과 객관이 마음과 같다. 마음이 본래 부처이고, 부처가 본래 마음이며, 마음은 허공과 같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부처의 진짜 법신은 허공과 같다.’라고 하였다. 따로 구할 필요가 없으니, 구한다면 모두가 고통이다. 설사 강바닥의 모래알 같은 세월 동안 육도만행(六度萬行)을 행하여 부처의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역시 마지막 진실은 아니다. 왜 그런가? 이러한 일들은 모두 인연에 따른 조작에 속하므로, 인연이 다하면 도로 덧없음으로 돌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보신과 화신은 진짜 부처가 아니고, 또한 법을 말하는 자도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다만 자기의 마음을 알기만 하면, 나도 없고 남도 없고 본래가 부처이다.”

<요약>

수행하는 것은 모두 인연에 따라 조작하여 만드는 것이므로, 조작하여 만든 것은 결국 다시 사라져 버린다. 그러므로 수행하여 이룬 결과는 아무리 그럴듯한 것이라도 본래 있는 그대로의 실상(實相)인 마지막 진실은 아니다.


⑤ 깨달음이 없으면 헛일이다

   “이 마음은 곧 마음 없는 마음이니, 모든 모습을 벗어나 중생과 부처가 전혀 차별이 없다. 다만 마음이 없기만 하면 곧장 마지막 깨달음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만약 당장 마음이 없지 못하다면, 아무리 오랜 세월 수행(修行)하더라도 마침내 깨달을 수 없으니, 삼승(三乘)의 수행에 매여서 해탈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마음을 깨닫는 데에는 빠르고 늦음이 있다. 설법을 듣고서 한 순간 문득 마음이 없어지는 자도 있고, 십신(十信)․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에 이르러서야 마음이 없어지는 자도 있고, 십지(十地)에 이르러서야 마음이 없어지는 자도 있다. 그러나 빠르건 더디건 마음이 없어지면 그만이지 다시 수행하거나 깨달을 것은 없다. 참으로 얻는 것이 없다면, 진실하여 헛되지 않다. 한 순간에 이루든 십지에 이르러 이루든 그 효용은 꼭 같아서 다시 깊고 얕음이 없으므로, 오랜 세월을 지나는 것은 괜한 헛수고일 뿐이다.”

   “설사 무한한 세월 동안 정진수행하고 모든 지위를 거치더라도, 한 순간 깨달을 때에 이르러서는 다만 원래의 자기 부처를 깨달을 뿐, 그 위에 다시 한 물건도 더할 수 없다. 깨달았을 때에 오랫동안 행해 온 노력을 돌이켜 보면 모두가 꿈속의 허망한 짓일 뿐이다. 그래서 여래는 말하기를 ‘나는 위 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에서 참으로 얻은 것이 없다. 만약 얻은 것이 있다면, 연등부처는 나에게 수기(授記)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며, 이것을 일러 깨달음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요약>

아무리 오래 수행하더라도 깨달음이 없으면 헛일이다. 당장 깨닫는 사람이나 오랜 세월 수행하여 깨닫는 사람이나 깨달으면 그뿐 다시 다른 일은 없다. 그러므로 오랜 세월 수행하는 것은 괜한 헛수고일 뿐이고, 도리어 수행에 얽매여서 깨닫지 못하는 병폐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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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수행은 조작이니 업 짓는 일이다

   “그대들은 곳곳에서 ‘닦을 것도 있고 깨달을 것도 있다.’라고 말들 하지만, 착각하지 말라. 설사 닦아서 얻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삶과 죽음을 오고갈 업(業)이다. 그대들은 또 육도만행을 고루 닦는다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모두가 업을 짓는 일이다.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하는 것은 곧 지옥 갈 업을 짓는 것이고, 보살을 구하는 것 역시 업을 짓는 일이며, 경전을 보고 가르침을 살피는 것 역시 업을 짓는 일이다.”

   “나아가 외로운 산봉우리에서 홀로 살며, 아침 한 끼만 먹고, 눕지 않고 늘 앉아 지내며, 밤낮으로 도를 닦는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모두 업을 짓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머리․눈․골수․뇌․나라․성곽․아내․자식․코끼리․말․칠보(七寶)를 모두 보시한다 하더라도, 이와 같은 견해는 모두 몸과 마음을 괴롭히는 것으로 괴로운 과보를 초래할 것이니, 일 없이 순일하고 잡스러움이 없는 것만 못하다.”


② 닦아서 보충할 부족함이 없다

   “도 배우는 이들이여! 곳곳에서는, ‘닦아야 할 도(道)가 있고, 깨달아야 할 법(法)이 있다.’라고 말들을 한다. 그대들은 무슨 법을 깨닫고 무슨 도를 닦는다고 말하는가? 그대들이 지금 활용하는 곳에 무엇이 모자라며, 어느 곳을 닦아서 보충하겠다는 것인가? 공부하는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곧 이런 부류의 들여우․도깨비를 믿고서 그들이 말하는 것을 받아들여서 사람들을 결박하고는, ‘이치와 행동이 상응하고 삼업(三業)을 아껴야 비로소 부처가 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말하는 자는 봄날의 가랑비처럼 많다.”


③ 좌선은 조사 문중의 법이 아니다

   “대덕들이여! ‘밖에는 법이 없다’고 내가 말을 하면, 학인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곧 속으로 알음알이를 지어서, 벽에 기대어 앉아 혀를 입천장에 붙이고는 고요히 움직이지 않으면서, 이것을 조사(祖師) 문중(門中)의 불법(佛法)이라고 여긴다.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대들이 만약 움직이지 않는 청정한 경계를 불법이라고 여긴다면, 그대들은 저 무명을 주인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옛 사람이, ‘고요하고 컴컴하고 깊은 동굴은 진실로 두렵다.’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또 그대들이 만약 저 움직이는 것을 불법이라고 여긴다면, 풀과 나무도 모두 움직일 줄 아니 마땅히 도(道)라고 해야 할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바람이요 움직이지 않는 것은 땅인 까닭에,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은 모두 자성(自性)이 없는 것이다. … 대덕들이여!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은 두 가지 경계인데, 의지함 없는 도인이 움직임도 쓰고 움직이지 않음도 쓰는 것이다.”


④ 좌선선정은 외도의 법이다

   “어떤 눈먼 중은 배불리 밥을 먹고는 곧 좌선관행(坐禪觀行)을 하며, 생각을 꼭 쥐고서 새어나가지 못하게 하며, 시끄러운 곳을 싫어하고 고요한 곳을 찾으나, 이것은 외도(外道)의 법이다. 조사가 말하기를, ‘그대가 만약 마음을 붙잡고 고요함을 살피며, 마음을 들어 밖으로 비추고, 마음을 거두어 안으로 깨끗이 하며, 마음을 집중시켜 정(定)에 든다면, 이와 같은 것들은 모두가 조작하는 짓이다.’라고 하였다. 그대는 지금 이렇게 법을 듣는 사람인데, 어떻게 바로 그 사람을 닦겠으며 깨닫겠으며 장엄하겠는가? 그 사람은 닦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며, 장엄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⑤ 깨달음이 없으면 헛일이다

   “나의 견처(見處)에는 진실로 여러 가지 도리(道理)가 있지 않다. 작용하고자 하면 곧바로 작용하고, 작용하지 않으면 바로 쉴 뿐이다. 곳곳에서는 육도만행을 말하면서 이를 불법(佛法)이라고 여기지만, 나는 말한다, ‘이것은 장엄문(莊嚴門)이고 불사문(佛事門)이지 불법은 아니다.’라고. 또 재계(齋戒)를 잘 지키며 기름그릇을 높이 들고 가도 출렁거리지 않게 할 정도라 하여도, 도를 보는 안목이 분명치 못하면 모두가 빚을 갚고 밥값을 치러야 할 날이 오게 될 것이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출가하여 도리에 통달하지 못하면, 몸을 돌이켜 신도들의 시주를 갚아야 한다. 장자(長者)가 여든 한 살이 되면, 그 나무에 더 이상 버섯이 나지 않으리라.’라고 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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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성인(聖人)이 말씀하셨다. ‘도는 닦을 필요가 없으니, 다만 오염되지만 말라.’ 내가 말한다. ‘마음을 말하고 본성을 말하는 것이 곧 오염이고, 현(玄)함을 말하고 묘(妙)함을 말하는 것이 곧 오염이고, 좌선(坐禪)하여 선정(禪定)을 닦는 것이 곧 오염이고, 일부러 생각하는 것이 곧 오염이다. 지금 이런 모양으로 글을 쓰는 것이 특히 오염이다. 이것을 내려놓는 것 이외에 결국 어떤 것이 확실히 힘을 얻는 곳인가? 금강왕보검(金剛王寶劒)으로 당장 절단낼 때에는 인간인지 인간이 아닌지를 상관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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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행이라는 행위를 통하지 않는다면, 선에서는 어떻게 공부하고 어떻게 깨닫는가? 선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깨달음을 얻어 바른 안목을 갖춘 선지식(善知識)을 찾아뵙는 것이 우선 첫 번째 공부이다. 선지식을 찾아뵙고 질문하거나, 선지식이 깨우쳐주는 가르침을 듣는 것이 곧 공부이다. 선에서 깨달음이 일어나는 것은, 선지식이 일깨워주는 가르침을 듣고서 문득 마음이 사라지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선지식의 역할은 앞서 살펴본 혜능의 말처럼 다만 분별망상에 얽매인 범부의 마음을 알맞게 풀어주어 범부가 문득 분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일 뿐, 무슨 법을 전해주는 것은 아니다. 깨달음이란 우리의 본래 마음을 가로막고 있는 망상분별에서 벗어나는 것일 뿐,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선지식의 역할은 분별에서 풀어내는 방편을 사용하는 것이다. 분별에서 풀어내는 방편이니, 그 방편은 당연히 분별할 수 없는 것이다.

   분별할 수 없는 방편을 말하는 것이 선지식이고, 그 말을 듣고서 문득 분별이 사라지면 학인은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이처럼 역대 조사들과 선사들의 깨달음은 거의 전부 말을 듣고서 곧장 마음이 활짝 열리는 언하대오(言下大悟)이다. 물론 선지식의 일깨움을 듣고도 그 즉시 깨닫지 못하고 그 일깨움이 분별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었다가 어느날 홀연 깨닫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역시 선지식의 말씀이 깨달음을 일으키는 실마리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선사들은 늘 선지식을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으라고 강조한다.

(1)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2) 언하변오(言下便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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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만약 마음이 어리석어 자성을 보지 못한다면, 선지식에게 물어서 길을 찾아야 한다. 네가 만약 마음을 깨닫는다면 곧 스스로 자성을 볼 것이니, 법에 의지해 수행하라.”  - 육조혜능

   “만약 상근기 중생이라면 문득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고서 말을 듣고 바로 알아차려서, 다시는 계급과 지위를 거치지 않고 즉시 본성(本性)을 깨닫는다.”  – 마조도일

   “본래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닫는 것이 곧 자기 부처인 줄 알지 못하고 밖으로 구하여 부처를 찾는다.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닫는다는 선지식의 말을 약으로 삼아 밖에서 구하는 병을 치료하면 밖에서 구하지 않게 된다. 병이 나으면 약은 버려야 한다.”  – 백장회해

   “도 닦는 이들이여! 출가한 이라면 모름지기 도를 배워야 한다. 나의 예를 들면, 과거 한 때에는 계율에 마음을 두기도 한 것이 수십년이고 또 경전과 논서를 탐구해 보기도 하였으나, 뒤에 이것들이 세상을 구제하는 약이며 드러내 보인 말일 뿐임을 알고서 비로소 일시에 이것들을 버리고 도(道)를 묻고 선(禪)을 찾았다. 그 뒤 큰 선지식(善知識)을 만나보고 나서야 비로소 도를 보는 안목이 분명해져서, 천하의 노스님들을 알아 볼 수 있게 되었다.”  – 임제의현

   “삼가 여러분께 권하노니, 눈 밝은 종사(宗師)를 만나기가 매우 어려움을 알고, 만일 이미 만났다면, 마치 한 개 수미산(須彌山)에 의지한 듯 하여야 한다. 곧장 한 발 물러나 나와 남이라는 수많은 분별과 무명(無明)의 어리석음과 이제까지 책을 보고 배우고 기억한 것들을 내려놓아서 한쪽으로 밀쳐놓되, 억지로 주인 노릇하려고 하지는 말아야 한다.”  - 대혜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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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지식이 일깨우는 말을 듣고서 깨달음을 얻은 몇몇 사례들을 소개한다. <전등록>을 보면 거의 모든 선사들이 스승의 말을 듣고 문득 깨달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경을 알리는 북이 울리자 저는 오조가 계신 방에 들어갔습니다. 오조께선 가사(袈裟)를 가지고 방문을 막아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금강경>을 말씀해주셨는데, ‘마땅히 머묾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라는 구절에 이르자 저는 그 말씀에서 크게 깨달았는데, 일체의 만법(萬法)이 자성(自性)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 육조혜능

   육조는 잠시 침묵한 후에 혜명에게 말했다.

  “선(善)도 생각하지 말고, 악(惡)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로 이러한 때에 어느 것이 혜명 상좌(上座)의 본래면목입니까?”

   혜명은 말을 듣고서 크게 깨달았다. – 혜명상좌


   마조가 말했다.

  “나는 어떤 때에는 그에게 눈썹을 치켜올리고 눈을 깜빡이도록 시키고, 어떤 때에는 그에게 눈썹을 치켜올리고 눈을 깜빡이도록 시키지 않는다. 어떤 때에는 눈썹을 치켜올리고 눈을 깜빡이는 것이 옳고, 어떤 때에는 눈썹을 치켜올리고 눈을 깜빡이는 것이 옳지 않다.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약산은 말을 듣고서 깨달았다. – 약산유엄


   옛날 귀종식안(歸宗拭眼) 선사에게 어떤 승려가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귀종이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 말해 주면, 그대가 믿겠느냐?”

   “스님께서 진실하게 말씀하시는데,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대이다.”

   그 승려는 귀종의 말을 듣고 잠시 말없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제가 바로 부처라면, 다시 어떻게 보임(保任)합니까?”

   귀종이 말했다.

   “티끌 하나라도 눈에 들어가면, 헛꽃이 어지러이 휘날린다.”

   그 승려는 그 말을 듣자 문득 깨달았다. – 무명승


   나산법보(羅山法寶) 대사가 일찍이 석상보회(石霜普會)에게 물었다.

   “일어나고 사라지며 머무르지 않을 때에는 어떻습니까?”

   석상이 말했다.

   “곧장 불꺼진 재와 마른 나무처럼 되어야 하고, 한 순간이 영원처럼 되어야 하고, 상자와 뚜껑이 서로 꼭 맞듯이 되어야 하고, 온통 말끔하여 티끌 한점도 없어야 한다.”

   나산은 계합(契合)하지 못하고, 다시 이 말을 암두(巖頭)에게 물었다. 묻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암두는 위세 있게 “악!” 하고 일할(一喝)을 하고는 말했다.

   “무엇이 일어나고 사라진다고?”

   나산은 그 말을 듣자 크게 깨달았다. – 나산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