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원장님과의 대담


(1) 대담 1

(2003년 3월 3일. 초발심한 사람과의 대담)


처음 공부하는 사람이 어떤 마음 자세로 공부에 임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 공부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나,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인 사람이나 마음가짐이라고 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마음가짐은 결국 공부에 대해서 얼마나 갈증을 가지고 있는가, 얼마나 목이 말라 있는가, 그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죠. 비유를 들면, 젖먹이 어린애가 엄마한테 젖 달라고 우는 것 같은 그런 심정, 어린애가 생각으로 헤아리고 계산해서 젖 달라고 하는 게 아니거든요. 그저 배가 고파서 우는 거죠. 그런 것처럼 이 공부도 내가 머리로 ‘뭘 어떻게 해야 되겠다.’ 이런 의도적인 것이나 의식적인 것, 그런 것들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배고픈 어린애와 같은 그런 절실함이 중요한 것이거든요.
이 공부가 이렇게 저렇게 좋으니까, 그런 이유가 있고 그래서 그런 이유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공부를 해야 되겠다는 그런 계산적인 발심이 아니고, 자기도 모르게, 어린애가 배고프듯이, 그냥 배가 고픈 겁니다. 공부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라고 해도 좋고, 뭐라고 딱 꼬집어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그냥 배가 고픈 겁니다. 그런 식으로, 진실로 배가 고프면 멀지 않아서 반드시 응답이, 거기에 대한 반응으로서 진실한 자리가, 공부의 결과가 나오는 겁니다.
이것은 아주 상식적인 거죠. 무슨 이치가 있는 게 아닙니다. 그냥 우리 삶에 있어서 아주 상식적인 원리죠. 그런 원리지, 무슨 이치가 있어서 그 이치에 따라서 이렇게 하면 저렇게 된다, 그런 것이 아니에요. 누구나 다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고, 자연스럽게 행할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공부라는 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은 공부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란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아니, 대단히 중요한 것 정도가 아니라 공부의 전부입니다. 마음가짐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공부가 아주 짧은 시일에, 어떤 사람은 6일을 이야기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3일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 내에 가능하다는 거죠. 사실 그렇습니다. 그러나 마음가짐이 잘못되어 있으면 수십 년을 해도 항상 수박 겉핥기예요. 공부가 안 된다 이겁니다. 늘 그냥 그 상태죠. 그런 사람들을 보면 자기 스스로 마음가짐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은 모르고, ‘뭔가 방법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서 온갖 여러 가지 방법이나 사람을 찾아서, 이런 방법도 써보고 저런 방법도 써보고 사람도 만나보고 하는 거죠.
그런데, 그건 머리에서 나오는 계산이기 때문에 안 맞는 겁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젖먹이 어린애가, 아직까지 머리로 계산할 줄 모르는, 그저 배가 고프니까 젖 달라고 우는 그런 순수함! 계산이 전혀 개입되지 않는 그런 배고픔, 목마름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으로 공부는 되는 겁니다.
본래면목의 응답이란 것은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본래면목이란 것은 우리에게 이미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갖추어져 있는 것이 왜 드러나지 않느냐? 그것은 우리들의 계산, 의식적인 헤아림 때문에 안 드러나는 것입니다.
첫 질문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느냐고 하셨는데 정말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것이 공부의 시작이자 공부의 전부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방법은 소용이 없어요. 방법이란 것은 어떤 방법을 쓰든 별 상관이 없어요. 기도를 해도 좋고, 절을 해도 좋고, 화두를 하든, 뭘 하든 상관없어요. 제가 볼 때는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제일 좋아요. 어떤 방법도 취하지 않는 게… 왜냐하면 그런 방법이란 것에 잘못 매여 들어가면 그런 방법이 주는 어떤 일시적이고 조작적인 효과에 매여가지고 그것들이 공부인 양 착각하는 수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방법은 없는 게 좋습니다.
다만 진실로 목이 마르다고 한다면 자기 자신의 본래면목, 자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멀리 둘러간다거나 어떤 특별한 방법을 통해서 드러나는 게 아니란 말이죠. 바로 즉각 그 자리에 바로 드러나는 게 이거거든요. 그 어떤 무슨 깨져야 될 껍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버려야 할 번뇌나 업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자기 자신의 진실한 존재, 자기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니까, 아무 조건 없이 있는 그 자리에서 즉각 드러나는 것이지 특정한 방법을 통해서 갈고 닦아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오직 필요한 것은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헤아림이 아니라, 진실하고 꾸밈없는 정말 절실해서 피할 수 없는 그런 발심입니다. 그런 목마름, 배고픔, 그것이 이 자리를 문득 체험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작이자 끝이죠.
공부를 10년 동안 해온 사람이나 하루를 한 사람이나 이 자리를 모르면 조건은 똑같은 겁니다. 아무런 차이가 없어요. 알거나 모르거나 이지, 십년을 해온 사람이라고 해서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게 아니에요. 십년을 해왔든 하루를 공부했든, 진실한 목마름, 진실한 배고픔, 이것 하나만 갖추어지면 멀지 않아서 그 자리를 보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은 이렇게도 생각해요. ‘나는 정말 공부를 하려고 발버둥을 많이 쳤다. 그래서 나는 발심이 되어 있다. 정말 나는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도 왜 안 되느냐? 내가 뭔가 방법이 잘못된 게 아니냐?’ 이렇게 질문할 수가 있단 말이죠. 그런데 제가 볼 때 그분은 아직 방법을, 요령을 찾고 있기 때문에 진정으로 배고픔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진정 배가 고픈 사람은 요령을 찾을 겨를이 없어요. 정말 배가 고프면 눈이 뒤집어지거든요.

   장발쟝이 눈앞의 빵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진열장을 깨고 빵을 훔쳐 먹을 만큼 그런 배고픔! 그 상황에서 ‘내가 유리창을 깨고 빵을 훔쳐 먹으면 처벌받을 텐데…’라는 그런 계산이 나온다면 아직까지는 배가 덜 고프다는 거죠. 진정 배가 고프다면 요령을 계산하는 그런 생각이 떠오르질 않아요. 그냥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서 죽을 지경일 뿐이지… 이렇게 하면 되고, 저렇게 하면 안 될 텐데 하면서… 헤아리고 따지고 있는 동안에는 아직은 배가 덜 고픈 거죠. 그러니까 자기가 생각할 때는 ‘나는 정말 공부가 하고 싶은데…’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이런 방법, 저런 방법을 따져 보고 헤아려 보고 있다면 진정 배가 고픈 게 뭔지를 아직 모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진정 배가 고프면 눈에 보이는 게 없어요. 그만큼 절실해야 되는 겁니다.


제가 항상 하고 싶었던 공부를 찾는데 젊은 시절을 다 보냈습니다. 이제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교수님을 만나 다행입니다. 너무 늦다는 생각에 초초하기도 하고, 또 절에 가서 스님들처럼 평생 공부해도 세월만 보내는 사람들도 많은데, 이제부터 공부를 하더라도 제가 원하는 만큼 공부의 어떤 성취라고 할까? 이런 것들이 가능한 지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 공부를 하려고 많은 시간을 보내셨다고 하면서도 아직 이 자리를 만나지 못해서 초초하다 하시니 이제 상당히 배가 고플 만큼 고픈 겁니다. 아직도 그 배고픔을 채우지 못하고, 목마름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하시니까 보기에 안타깝기도 합니다.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초초할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우리 속담에 이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이다.’ ‘공부가 될까?’ 하는 그런 걱정도 이해는 됩니다만, ‘내가 원하는 만큼 공부가 될까? 안될까?’라는 계산을 하고 계시는 걸 봐서는 한편으로 아직 충분히 배고프지 않다는 그런 느낌도 들거든요.

   어쨌든 또 이런 말도 있잖아요? 죽기 직전이라도 이 공부에 눈을 뜨고, 이 맛을 보면, 죽음이 다르다고 하듯이, 나이에 상관없이 이 맛을 보고자 하는 그런 간절함만 있으면 그걸로 맛을 보는 것이고, 그리고 맛을 보고나서 얼마만큼 더 공부에 깊이 들어가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는 그 뒤의 문제죠. 우선 이 공부의 맛을 보는 게 첫째 일이니까, 연세가 그만큼 드셨다니 더 초초하고, 더 절박하고, 더 안타까운 마음으로 정말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고 하듯이, 도구가 좋은 게 없더라도 맨손으로라도 진흙물을 파야 될 그런 절박함을 느끼신다면, 이제까지 공부가 하고 싶어서 계속 찾아 다니셨다고 하니까, 간절한 심정으로 공부에 매달리시면 오래지 않아서 공부의 맛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공부의 맛을 본  뒤의 공부는 그때 가서 상황에 따라서 하시면 되는 것이고, 우선은 죽기 전에 꼭 이 공부의 맛을 봐야 되겠다는 그런 절박한 심정으로, 다른 계산이나 헤아림 없이 그냥 한결같이 이 공부에 대한 목마름 하나에만 의지를 해서 공부를 하시면 머지않아 좋은 결과가 오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이런저런 책도 읽고 법문도 듣고 해서 마음이 곧 부처라는 걸 생각으로나 교리적으로나 이론적으로는 조금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라는 건  보이지도 않고 그렇기에 제 가슴에 실질적으로 와 닿는 부분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마음을 직접 맛볼 수 있는 그런 것들이 어떻게 가능한 지, 가장 기초적인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 사실 우리는 누구나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자기 마음을 맛보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항상 자기 마음을 맛보고 있으면서도 그 맛을 못 느끼고 있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가 밥을 먹을 때를 생각해 보시면 돼요. 밥을 먹으면서 순수하게 항상 밥의 맛에만 취해있으면 그 밥맛을 아주 미세한 맛까지 다 느낄 수가 있는데, 밥을 먹으면서 밥 먹는 것이 아닌 다른 곳에 생각이 가 있고 관심이 가 있으면 밥맛을 모르는 겁니다. 밥을 안 먹고 있는 게 아니고, 마음을 내가 맛보고 있지 않는 게 아니고, 맛을 보고 있으면서도 그 맛을 못 느끼고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맛을 보고 있지 못 하니까 맛을 봐야 된다는 게 아니고, 맛을 보고 있다는 이 사실을 실제로 자기가 자각을 하는 게 우리가 이야기하는 마음공부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 밥을 안 먹고 있으니까 밥을 먹기 위해서 밥을 지어서 입에 넣고 하는 그런 행동이나 해야 될 일이 있는 게 공부는 아니다 이겁니다. 그런 게 아니고 우리가 지금 밥을 먹고 있으면서도 다른 데 관심이 있고, 다른 것을 보고 있고, 다른 곳으로 가 있는, 그걸 망상이라고 합니다만, 그 망상을 끌어다 지금 눈앞의 밥 먹고 있는 여기에 가져오면 되는 것이에요.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내가 하고 있는, 거기에다 계속해서 관심을 두는, 관심을 둔다는 게 다른 게 아니라, 늘 항상 지금 이 순간에 내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것! 그러면서도 그것은 경계의 변화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 경계라고 하는 것은 항상 왔다 갔다 하며 무상하게 변화하는 것이거든요. 그러나 마음이라고 하는 놈은 무상하게 변하는 경계 그 가운데에서 항상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우리가 경계를 맛보고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경계를 맛보고 있는 걸로 착각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 경계, 저 경계, 눈앞에 나타나고, 머리 속에 나타나고, 우리 감각 속에 나타나고 있는 경계들을 항상 순간순간 맛보면서 지나간다고 알고서 계속 그런 곳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마치 밥을 먹고 있으면서 다른 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그런 경계가 왔다 갔다 하는 가운데에도 한결같이 변함없이 왔다 갔다 하지 않고 늘 눈앞에 또렷하게 나타나 있는 것! 이게 말하자면 우리가 항상 맛을 보고 있는 마음이거든요. 늘 눈앞에 또렷하고, 생생하고, 부정할 수 없고, 분명한 이것! 왔다 갔다 하는 모양이 아닌 이것!
지금 우리의 상황이라는 게 영화를 보고 있는 것과 같아요. 영화 화면이 지금 왔다 갔다 하면서 변하고 있는데, 영화 화면은 오색찬란한 빛으로 어둡기도 하고 밝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변하지만 한결같이 거기에는 빛이 있거든요. 밝음이 있다 이거예요. 그 밝음이란 게 뭐냐 하면 화면은 다양하게 바뀌고 있지만 이리저리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대로 있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런 말 가운데 의식적으로 ‘그래, 이거야!’ 하고 거기에 멈춘다면 아직까지는 그 문 앞까지 와 있는 겁니다. 안으로 쏙 들어온 것은 아니거든요. 그 자리에 의도적이고 의식적으로 있으라는 말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모양을 따라가지 않고, 경계를 따라가지 않고, 지금 눈앞에서 화면이 바뀌고 있는 와중에 변함없이 그 화면을 보고 있는 것이 있다는 말이죠. 이런 이야기를 듣다가도 그 놈이 몰록 탁! 하고 잡히면 거기가 하나의 관문이에요. 탁! 하고 넘어가면 이런 말 저런 말이 갑자기 사라져 버려요. 이런 말도 저런 말도 없어! 없으면서 단지 뚜렷하고 분명하게 밝을 뿐입니다.
변함없는 게 있어요. 그런 경험이 필요한 거죠. 마음을 맛본다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항상 마음을 맛보고 있으면서도 한번도 그 맛을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의 맛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는 겁니다. 지금까지 느껴왔던 맛은 마음으로 인해서, 이 마음을 가지고 다른 허깨비를 쫓아다니며 맛본 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의식적으로 알아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아주 새로운 경험을 합니다. 경험해 놓고 보면 자기가 결국은 항상 가지고 있었던 그것이지만 경험하기 이전에는 이것을 아무리 설명해도 상상할 수가 없어요.
어쨌든, 이렇게 저렇게 생각으로 ‘이런 경험일 것이다.’라는 어떤 상상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맛을 보아야 해결되기 때문에 오로지 맛보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가짐 하나를 가지고, 지금 항상 눈앞에서 또렷하게 맛보고 있다는데, 영화 화면같이 끊임없이 지나가는 이 가운데에서 자기의 존재, 나라는 존재는 지금 어디 있느냐? 그것을 한번 잘 살펴보시면 그런 와중에 몰록 계합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계합되는 것이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릅니다. 사람에 따라서 아주 강렬하게 확 올 수도 있고, 아주 미미하게, 왔는지 안 왔는지 모르게 쓱 지나갔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왔다는 사실을 알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어쨌든 자기 존재를 확인해내야 하는 겁니다. 그럴 때 비로소 마음을 맛본다는 이야기를 붙이는 겁니다. 사실은 마음을 맛보고 나면 그런 이야기 자체가 생각이 안 납니다. 마음을 맛본 사람이 ‘내가 마음을 맛보았다.’라는 생각이 일어나는 동안에는 아직까지 밥을 먹으면서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과 같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밥을 먹는데 밥맛이 정말 좋을 때는 ‘이 밥이 맛이 있구나!’ 이런 생각도 안 일어나죠. 허겁지겁 먹기 바쁘죠. 그것과 같은 거죠. 마음을 정말 맛보면 마음의 맛에 푹 빠져 들어가서 이런 저런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 거지 ‘아, 지금 내가 이렇게 마음을 맛보고 있구나!’ 이렇게 되는 게 아니다 이겁니다.


공부를 하다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꽉 막혀서 눈물만 날 때도 있는데요,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될지 말씀을 좀 해주시기 바랍니다.

- 어찌 보면 그건 화가 치밀어 올라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해도 해도 안 된다.’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어떤 분노죠. ‘나는 왜 해도 해도 안 되는가?’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자기의 힘이 부족한 것에 대해서 절망스럽기도 하고, 분노가 일어나기도 하고, ‘이 공부가 왜 이렇게 어려운가?’ 그래서 아마 눈물이 날 수도 있겠죠. 잘못해서 그런 분노나 억울함에 끄달려 가면 병이 될 수가 있습니다.

   공부는 사실 그렇게 힘든 게 아닙니다. 늘 가벼운 마음으로 해야지 너무 부담을 가지고 하면 할 일도 못합니다. 평소의 경험으로도 알 수 있지만, 똑같은 일을 하는데 너무 부담스럽게 여기면 제대로 못해요. 자기 자신이 지쳐버립니다. ‘이것은 천 명, 만 명, 백만 명 중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하는 그런 위대한 일이다.’ 하는 부담스런 생각을 가지지 말고, ‘이건 뭐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다.’, 그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쉬운 일이다.’라는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부담 없이, 그러나 진실하고 절실하게, 가볍고 부담 없지만 얼마든지 진실하고 절실하게 할 수 있거든요. 그런 자세로, 즐겁게 해야 됩니다. 부담을 가지고 하니까 그렇게 억울하기도 하고, 스트레스도 받고, 힘이 드는 겁니다. 가슴이 답답하고 눈물이 나온다는 건 힘이 들어서 그런 겁니다. 힘들게 하시니까 오히려 쉽게 할 수 있는 일도 못해내고 있는 겁니다. 힘들게 하지 마시고 즐겁게 반드시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가벼운 마음으로 하시는 게 좋아요.


교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공부를 하셨는지 좀 저희들이 알기 쉽게 구체적으로 말씀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대한 답변은 앞에 나온 <선원장님의 공부 이야기>입니다. 그 내용을 참고하십시오.)


그럴 때 교수님께서는 이제 마음의 주인이 되었다는 그런 표현을 쓸 수도 있습니다만 저 같은 경우에는 저 자신이 내 마음의 노예로 이끌려 다닌다는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것을 알지 못하는 한은 마음의 노예라는 그런 생각은 어떠한지요?

- 마음의 노예죠. 끌려 다니니까요. 말에 끌려 다니고, 욕망에, 감정에, 관념에, 그렇게 전부 끌려 다니잖아요. 마음이란 것이 자신이 타고 다니던 말인데, 지금 우리는 어떤 상황이냐 하면 내가 말 꼬랑지를 붙잡고 말 뒤에서 쫓아가고 있는 거죠. 말을 타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힘들죠. 조절이 안 돼요. 말은 제 마음대로 가버리고…(웃음)

   중국의 선사들은 공부를 두고 ‘콧구멍을 붙잡는다.’ 이렇게 비유하기도 하거든요. 심우도(尋牛圖)에 보면 마음을 소에 비유하죠. 소는 코뚜레를 해서 콧구멍을  붙잡으면 꼼짝을 못하거든요. 아무리 작은 어린애라도 소 콧구멍만 붙잡으면 그 소는 따라와야 해요. 기막힌 비유를 하고 있는데, 그러니까 우리는 소등에 올라타서 코뚜레를 뚫어 고삐를 붙잡고 있는 게 마음공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소는 이리저리 내가 원하는 대로 가는 거죠. 소와 내가 곧 하나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부담이 없죠. 내가 소의 주인이라고도 이야기하기가 곤란해요. 소가 따로 있고 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소하고 내가 하나가 되니까. 이런 저런 생각이 없죠. 마음이 있다는 생각도 없고, 없다는 생각도 없어요. 그냥 하나가 되어서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죠.


하나만 더 질문 드리겠습니다. 저희가 보통 일상생활을 하면서 수행방편에 관한 문제인데, 보통의 경우에는 항상 화두를 챙겨야 된다든지, 염불을 한다든지 이런 식이 있고, 또는 아무 생각도 없이 일상생활을 할 수도 있는 문제고, 그냥 마음 가는 대로 그냥 내버려 둔다고 할까 하는 그런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어떤 식으로 하는 것이 마음공부에 있어서 바른 길이라고 할 수 있는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 화두를 든다거나, 염불을 하는 것 하고, 그런 것 저런 것 안 하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 하고,  마음 제 멋대로 그냥 내버려 두는 것. 이런 게 전부 똑같은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공부를 이렇게 저렇게 한다고 하는 공부의 방법에 대한 의도적인 헤아림이 개입되어 있다면 그건 공부가 아니에요.
제가 제 공부 한 것을 말씀드렸지만 지금 공부가 안된 사람 입장에서는 공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겁니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하는 것은 공부이고 저렇게 하는 것은 공부가 아니다 하고 자기 나름대로 생각을 해서 그쪽으로 노력을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 첫 질문에서도 나왔었지만, 그냥 공부에 대해서 배가 고파라 이겁니다! 배고픔, 목마름, 그 사실만 확실하면 배고프면 자기도 모르게 빵을 훔쳐 먹든, 밥을 해먹든, 언젠가는 저절로 그렇게 배고픔을 만족시키게 되는 것이고, 목이 마르면 우물을 파든, 강물을 퍼먹든 목마름을 식히게 되는 겁니다. 충분히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게 되면 그게 공부를 성취시켜 주는 것이지, 평소에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고 하는 것은 의식의 장난에, 의식적 놀음에 의지를 하고선 그것을 공부라고 착각을 하는 겁니다. 그건 공부가 아니에요. 의식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만들어서 공부한다고 착각을 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삼십 년 사십 년 해도 안 되는 겁니다.
공부에는 방식이 없다는 말입니다. 왕도가 없어요. 정해진 방식이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 공부를 해야 안심이 된다는 것은, 마치 사람이 속으로는 공부도 하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흉내를 내면서 불안한 마음을 달래는 경우와 똑같아요. 예를 들어 염불을 하지 않으면, 화두를 들지 않으면 불안하다면 그건 거기에 의존하고 있을 뿐, 실제 스스로는 공부를 안 하고 있는 거죠.
자기를 솔직하고 냉철하게 되돌아봐야 합니다. 되돌아보고서 진정으로 자기가 무엇에 배가 고픈가, 진정으로 자신이 이 공부에 목이 얼마나 마른가? 그렇게 되돌아보시면 돼요. 실제로는 세간적인 욕망에, 돈, 인정, 명예 이런 것에 배가 고프면서 겉으로만 ‘공부, 공부!’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속고 있을 수도 있어요. 자신이 진정으로 얼마나 이 공부에 배가 고파있는 것인가? 솔직하고 냉정하게 돌아보고, 조금이라도 배고픔이 있으면 공부는 거기에 의존해야 되는 겁니다. 배고픔만큼, 그 배고픔이 심해지면 공부는 앞으로 나아가 진전이 있는 것이고, 배고픔이 희미해지면 공부는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겁니다.
지금 식사시간이 되어서 배가 고픈데, 그냥 밥을 먹으면 그것으로 만족이 되는데, 밥 먹을 생각은 하지 않고, 실제로 밥을 먹는 행동은 하지 않으면서, 뭘 먹을 것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죠. 이것은 이렇게 먹어야 하고, 저것은 저렇게… 또는 요리책을 갖다놓고 요리책만 보고 있을 수도 있죠. 그러면서 식사시간을 놓쳐버리고, 배고픔을 잊어버리고, 자꾸 요리책만 보고… 우리가 공부를 한답시고 자꾸 어떤 방식에 의존한다는 건 바로 그런 겁니다. 실제 배고픔 그 자체에 아무런 가식 없고 격식 없이 그냥 맡겨놓아 버리면 자기도 모르게 그냥 부엌에 가서 밥을 찾아먹어요. 식은 밥이라도 혹시 없는가…. 무의식적이죠. 그렇게 되어야 공부가 되는 겁니다. 그래야 실제로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이고, 불러지는 것이죠.
의식이란 놈은 장난을 잘 치거든요. 온갖 요리책을 보면서, 말하자면 망상 속에서 만족을 할 수가 있는 거예요. 배는 여전히 고픈데도 자신은 안 고프다고 착각할 수도 있어요. 어떤 생각도 개입시키지 말고, 공부에 대한 어떤 계산도 하지 말고, 하여튼 지금 자기가 알고 있는 의식을 가지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의식적으로 손을 쓰는 것은 아니다! 손을 완전히 놓아버리고 그야말로 자신의 가슴, 자신의 내면의 배고픔이 요구하는 그것을 충족시켜 주는 대로 따라가면 되는 겁니다.
내 의식으로써 이렇게 저렇게 공부에 대해서 헤아려보고, 생각해보고, 이만큼 공부가 되는구나, 또는 안 되는구나, 학교 공부하듯이 그렇게 해 가지고는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을 해도 배고픔은 여전한 겁니다. 잊어버릴 수는 있지만 잊어버린다 해서 배고픔이 충족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맨 처음 질문하셨던 “마음가짐”, 이것이 제일 중요한 겁니다. 진정자신이 어디에 목이 마르고 어떻게 배가 고픈가, 그것은 자신이 의식적으로 도무지 손을 쓸 수 없는 것이다. 그건 머리를 써서 하는 게 아니니까 별 어려운 것이 없어요. 맡겨두면 되는 거예요. ‘언젠가는 될 것이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부담 없이, 너무 부담을 가지게 되면 거기에 의식이 개입이 되는 수가 있어요. 부담 없이 가볍게 공부를 해 나가시면 됩니다. 


(2) 대담 2

(2003년 4월 8일. 문학 창작을 통해 인간의 근본 문제를 탐구하던 사람과의 인터뷰)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마음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시겠습니까?

-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름일 뿐이에요. 이름일 뿐이고, 그것을 알 수 있는 길은 자기가 직접 체험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길밖엔 없습니다. 설명을 통해서는 절대 알 수 없습니다.
첫째 어떤 식으로든 설명을 통해서는 절대 알 수 없다. 오직 체험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지, 이미 경전이나 스님들의 어록들이 모두 마음에 관한 설명들이지만 다들 다르고 어느 것 하나 정확하게 맞는 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에 따라서, 듣는 사람에 따라서 필요한 약으로 쓴 것이다 이거죠. 그래서 마음이란 것은 말로써 설명해서 개념적으로 잡아낼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잡아내려면 그 마음을 정말 알고 싶은 사람이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느냐, 소위 마음공부라고 하는 것은 그 자세를 교정해 주는 겁니다.
처음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지식으로 관념적으로 알려고 하죠. 그런데 여기서 마음공부란 이름으로 가르치는 것은, 그런 자세를 가지고서는 마음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태도를 바로 잡아 주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마음을 알고 싶은 욕망,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어떤 장난감을 가지고 싶어서 밤잠을 못 자는 것과 같은 간절함이 있을 때 스스로가 스스로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 게 마음이거든요. 그런 거지, 마음은 이런 거다 저런 거다 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사실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마음공부라고 하는 것은 어떤 책을 많이 읽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알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고요, 자기 자신의 자세에 달려 있는 겁니다. 


알고 싶어 하는 간절한 그런 마음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건가요? 

- 그렇죠. 그것밖에는 요구되는 게 없습니다.
   외면적으로 보통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따라서 돈, 가족, 명예와 같은 그런 것들을 어느 정도 갖추고 살아도, 그런 것에 대한 관심보다도 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랄까, 내 삶의 가치는 이런 데 있는 게 아니고 그것은 내 스스로의 내면에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막연한 욕망 같은 것. 그래서 삶에 있어서 돈을 버는 것이라든지, 명예나 가정사와 같은 세속적인 가치라는 게 별로 대단하게 여겨지지 않고, 뭔가 내면적인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평소에 가진 사람이 이것을 할 수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그저 지식에 그치고 말지요. 말하자면 수박 겉핥기밖에 못하는 거죠. 


저 같은 경우는 특히 사춘기 이후로 진실한 나는 누구인가하고 질문을 했었는데 그 시기에는 답을 못 내리고 흐지부지 넘어가서는 대학 생활을 하고, 사회 생활을 하다보니까 생각할 수 있는 여건들이 못 되어서 이런저런 흐름들에 휩쓸렸던 것 같아요. 뭔가를 이루기 전에는 그것을 바쁘게 추구하다가 그것을 이루고 난 뒤에는 허전한 거예요. 계속 똑같은 패턴으로 뭔가를 따라가야 하는 불완전한 상태가 이어지더라고요. 결론적으로는 ‘진리라는 것은 없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지금껏 살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확실하게 이것이다 하고 말씀하시니까 반신반의 한 거예요. 진짜 그런 것이 있는 것인가도 싶고… 그런 갈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닌데 아직까지 믿음이 가는 것은 아니거든요.  

- 우리의 세속사란 것이 이렇죠. 이번 일만 끝나면 그래도 내가 행복해지고 만족스럽지는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일에 뛰어들어서 온 정력을 다 바치는데 그 일이 끝나고 난 뒤에는 그 순간에는 끝낸 기쁨이 있지만 조금만 지나면 그냥 그대로예요. 아무 것도 변한 게 없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 말고 또 다른 일을 해야 하는구나 이러다 보면 금방 말씀하신 대로 ‘무엇을 해도 그냥 마찬가지네, 인생 살아가는데 뭐 특별한 게 없구나.’ 하면서 그렇게 포기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포기하면서도 좀 불안한 거예요. 

- 포기하지만 불만족스러운 것은 사실이에요. 만족스러워서 자기가 그만 둔 것은 아니니까… 불만족스럽지만 어떻게 그것을 만족스럽게 못하니까 포기하는 것이죠.
   그런 인생사 모든 문제들의 궁극적 해결이 외부에서 오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아무리 명예를 높이 추구해서 정상에 올라가도 거기서 전부 만족하는 것도 아니고,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거기서 만족하는 것도 아니고… 실제 이 만족은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밖에서는 찾을 수가 없구나.’ 이런 생각은 있었던 것 같아요.

- 내면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보통 예술, 철학, 문학 이런 쪽으로 대체적으로 관심을 가지거든요. 그것이 내면인 양 착각을 한다구요. 무슨 철학적인 탐구를 해서 대단한 이론을 습득한다든지, 문학이나 예술 같은 것을 통해서 인간 심리나 인간 삶의 여러 가지 다양한 측면들을 비추어 보는 것으로 인생을 전부 이해한 듯이 착각한단 말이죠. 


그런데 (글을) 쓰고 나면 그것을 안 본단 말이에요. 보기가 싫거든요. 그게 아닌 것 같기도 하고…

- 아니지, 할 때는 탐구욕에 빠져서 하지만, 하고 나면 허전하죠. 왜냐하면 그게 아니라는 것을 자기가 알기 때문에 안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모자라서 그만큼 채워주지 못했다는 생각을 먼저 하는 거예요. 실력이 없어서…

- 예술이나 철학은 그 작품성이나 이론성에 있어서 완결이란 건 없습니다. 없는데 우리는 완결을 기대하지요. 


그렇죠! 항상 그런 갈증을…

- 뭔가 완성이 있는데 내가 능력이 부족해서 완성에 못 다다른다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늘 노력하는 그런 식이죠.


언젠가는 진짜 뭔가 나올 거라는 생각으로…

- 그렇죠. ‘언젠가는 되겠지…’ 하면서… 그런데 왜 그것은 완결이 있을 수 없느냐 하면 인간이 조작해서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벨탑이죠. 만들어 내기 때문에 아무리 높이 쌓아도 100층을 쌓으면 101층이 다음에 기다리고 있는 식으로 끝이 없어요. 


정말 그럴까요? 진짜?

- 만들어 내는 것은 그렇죠. 생각해 보세요. 이치는 간단한 거예요. 인간이 예컨대 뭔가를 30년 간 만들어 왔다면 31년을 만든 사람은 30년 만든 사람보다는 더 많이 만들어 낸다구요. 만약에 인간이 80년, 100년, 200년 산다면 그 만들어 내는 양이나 깊이는 당연히 다르겠죠. 결국은 목숨이 다해서 끝나는 거지 그것을 다 못 만들어서, 만들어 내는 능력이 모자라서라기보다는 시간이 없는 거예요. 거기엔 완성이 없습니다. 있을 수가 없어요. 천년을 살아도 마찬가지예요.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은 끝이 없는 거죠. 자기 스스로는 나름대로 완결시켰다고 생각했는데 몇 년 후에 뒤돌아보면 완결이란 게 있을 수 없죠. 


왜 인간은 그렇게 사는 걸까요? 

- 그렇게 끊임없이 추구를 할 수밖에 없는 게, 첫 단추가 잘못 끼워져서 그런 거예요. 


그런데 대부분이 다…

- 대부분이 아니고 100% 다 그렇죠. 그러니까 그것이 기독교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저주받은 겁니다. 선악과를 먹은 그때부터 시작됐거든요. 불교식으로 이야기하면 그것이 중생의 출발점이죠. 


인간으로 태어나서 그럴 수밖에 없다…

- 그렇죠. 그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특징이죠. 인간은 육체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밖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존재를 보지 못해요. 바깥을 본다구요. 모든 육체적 기관이 다 바깥을 보게 되어 있거든요. 거기에 따라서 의식도 항상 바깥을 보게 되어 있어요. 감각을 통해서 습득한 것을 바탕으로 해서 자꾸 뭔가를 그려낸단 말이죠. 그것이 우리 의식의 기본적인 메카니즘이죠. 


감각을 재료로 자꾸 만들어 낸단 말씀이죠?

- 그렇죠. 끝없이… 의식의 메카니즘이 그렇잖아요. 인간이라는 어떤 육체를 가지고 태어난 존재는 우선 육체적인 감각에 바탕해서 생명을 유지해 가고 살아가면서 의식 자체가 그런 쪽으로 따라가는 거예요. 따라가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감촉하고 하면서 그걸 바탕으로 생각하고 여러 가지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하면서 살아가니까, 전부 이런 보고, 듣고, 냄새 맡고 하는 그런 차별되는 대상들을 조합하고 짜 맞춰서 그림을 만들어 내지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위 세계관이라는 게 전부 그런 거잖아요. 그 속에서 뭔가 좀더 조화롭고, 좀더 바람직하고, 좀더 그럴 듯한 그림을 그려내는 게 소위 말하는 철학이고, 예술과 같은 인간의 문화적인 활동이거든요.
그런데 있는 그대로의 현실, 인간 사회를 우리가 알고 있는 바, 배운 바의 가치관에 따라서 보면 부조리하지요? 그런 부조리한 사실이 뭔지 모르지만 불만족스럽단 말이죠. 그래서 그것을 만족스런 상태로 만들고 싶은데, 어떻게 만족스런 상태로 만들 것이냐? 예컨대 지금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듯이, 우리는 기본적으로 그 불만족스런 대상을 계속해서 내가 조절하고, 통제하고, 변화시킴으로 해서 그것을 만족스럽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게 가능하냐 이겁니다. 내 방 하나 정도는 아마 내 마음대로 꾸미고 바꾸는 것이 가능할 거예요. 그런데 우리 가족만 해도 그게 안 됩니다. 일단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세계를 바꾸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인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는 바깥 세상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니까 내 생각을 바꿔야 될 것이 아니냐 하고 생각합니다. 외부적인 어떤 대상들을 내가 조절해서 만족스럽게 만드는 게 불가능하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해답이 나오지 않으니까, 결국에 내는 마지막 답이 뭐냐 하면 자기의 생각을 바꾸는 거예요. 말하자면 외부적인 환경이 바뀌지 않으니까 내가 그 환경에 적응을 하는 거죠.
그러나 적응을 하려고 하면 나를 포기해야 하고 거기엔 여러 가지 고통이 따라요. 여전히 불만족스러움은 남아 있게 되는 겁니다. 사실은 그것도 해결책은 아니에요. 우리 인생의 문제라는 것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생각해 낼 수 있는 방법으로는 어떤 식으로든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종교에서 내놓고 있는 해결책은 그런 종류가 아닙니다. 내 스스로가 외면적으로든 내면적으로든 해결하고자 하는 그 방식을 버려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나 자신이 원하는 바를 버려야 돼요. 그렇지만 불합리한 상황에 적응하라는 말은 아니에요. 버리되 뭔가 탈출구가 있을 거라는 그 간절한 희망만은 버리지 말라 이겁니다. 내가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지만 나는 이것을 해결하고 싶다. 그렇게 되면 가슴앓이를 하게 되는데 그런 상황에 부닥쳐서 그 상황이 어느 정도까지 무르익어 가면 거기서 저절로 해결책이 나와요.
   그것이 제가 말씀드리는 “간절함”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해결책은 내 의식 위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어떤 방식으로도 결코 상상도 할 수 없는, 전혀 예상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해결책은 나와요. 갑자기 나를 짓누르고 있고 내가 짊어지고 있던 모든 짐들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모르는 식으로 한꺼번에 해결되는 겁니다. 


그런 해결책을 바라는 간절함 하나만으로 가능한 겁니까? 

- 그것밖에 없어요. 방법은.


그럼 그냥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그 해결책이 뭔가?’하는 그런 간절한 마음만 있으면 되는 건가요?

- 간절함이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여러 모로 찾아다니게 되죠. 간절함은 있지만 가만히 있으면 답답하니까… 이런 선원에도 오게 되고, 책도 보게 되고, 어디 훌륭한 스승이 있다고 하면 찾아가 묻기도 하고…


하지만 구체적인 설명을 해주시지는 않잖아요? 말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서… 

- 사실은 줄 수가 없어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는 거거든요. 남이 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 해결책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자기 존재에 대한 경험인데, 자기 존재를 자기가 가지고 있지 누가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결국 외부적으로 이리저리 방황하는 이유는 자기 존재를 몰라서 그런 거예요. 자기 존재를 인식하는 것은 누가 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가 확인하는 방법밖에는 없는 거죠. 이제까지는 밖으로만 쫓아다녔으니까 이제는 내면 쪽으로 방향을 돌리도록 유도해 줄 수 있는 것이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역할이죠. 


불경 말고도 예컨대 성경 같은 경우에도, 모든 경전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 네, 똑같죠. 금방 말씀드린 이런 내용이에요. 결론적으로 전부 다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거기에 쓰여 있는 말만 본다면, 불교에서 흔히 부처님 말씀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인데 어리석은 중생들이 달은 못 보고 손가락만 본다고 말하듯이, 대체로 거기 쓰여 있는 말만 보고, 손가락만 보고는 그 말이 가리키고 있는 바를 못 보고 있는 거예요. 그런 문제가 있어요. 그래서 책만 보고 기독교가 이런 거구나, 이슬람이 이런 거구나 하면 전부 손가락만 보고 이야기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달을 보고 싶은데, 그게 참…

- 달을 보고 싶으시면, 그게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니에요.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고, 자기 혼신의 힘을 기울여서 오랜 세월, 내 인생을 투자한다고 생각해야 돼요. 그래서 조급하게 하지 마시고 천천히 하면서도 간절함을 가지고 하시되, 믿음을 가져야 돼요. 언젠가는 될 것이다. 나라고 안 될 이유가 뭐가 있나? 그런 믿음. 마치 높은 산을 올라가는 자세로 앞만 보고 한 발 한 발 올라가야 되는 겁니다. 옆에 누가 얼마만큼 올라왔는지 볼 필요도 없고, 그렇게 되면 힘이 빠져 버려요. 앞만 보고 계속 가다보면 길만 보이다가  어느 순간에 갑자기 앞이 확 트이게 되는 겁니다. 그런 순간이 와요. 그때까지는 그렇게 가야 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남이 읽는 글 한 줄만 듣고도 깨쳤다던데요…

- 그 사람은 이미 그런 식으로 오랜 세월을 온 겁니다. 우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에요. 오랫동안 기본 자세를 갖춘, 말하자면 준비된 사람은 한번만 찔러줘도 돼죠. 줄탁동시(啐琢同時)란 말도 있잖아요? 달걀이란 게 갑자기 부화하지 않잖아요. 시간이 지나고 적당한 조건이 되어야 부화하는 거지…  


저는 처음에 좀 오해를 한 거예요. 되는 사람은 금방 되고 안 되는 사람은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게 아닌가…

- (웃음) 안 되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겁니다. 예컨대 달걀을 냉장고에 두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부화가 되지 않잖아요? 안 되는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는 겁니다. 


책이나 뭐 그런 자극을 받을 만한 것을 추천해 주실 수 있으세요?

- 볼만한 책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아무 책이나 보면 안 됩니다. 좋은 책은 사실 몇 권 안 됩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보통 책이란 것은 사람의 사념에서 나오잖아요. 사유에 의해서… 그것은 결국 사유로 이끌어 준다고요.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책 쓴 사람에게 익숙해지거든요? 사념으로 쓴 책은 사념만 연습시켜 주는 거니까 결국 이 자리에 오지 못하고 계속 엉뚱한 길만 가는 겁니다. 사념에서 쓴 책 말고 이 자리에서 쓴 책을 봐야 하는데, 이 자리를 경험한 사람도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자리를 경험한 사람이 사념을 끼워 넣지 않고 제대로 이야기한 게 많지 않아요. 모르는 사람은 이 책, 저 책 많이 보지만 그것은 다 사념 연습만 할 뿐이지 실재 자리하고는 관계가 없어요. 


그럼 평소에 여기에 관련된 책을 읽는다거나 하는 것이 이 공부를 하는 데 도움이 됩니까?

- 책을 읽고서 지식으로 이해한 것이 (공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으면 상관이 없어요. 그러면 책을 읽되 지식을 추구하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뭔가 있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읽으면 도움이 되죠. 간절한 마음을 일으키는 그것이 도움이 되고 지식은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겁니다.
   제일 적절한 예는 꿈 깨는 것을 생각해 보시면 돼요. 내가 지금 악몽을 꾸고 있어서 그만 깨고 싶다. 세상 살아가는 게 지금 악몽이다. 불만족스런 꿈이니까 깨고 싶다. 그래서 꿈속에서 꿈을 깨려고 여러 가지로 궁리를 하여 다리를 꼬집기도 하고, 고함을 질러 보기도 하면 꿈에서 깨느냐? 못 깨죠. 그것 자체가 꿈이거든요. 어떤 방법을 써도 깨어나지 않는데, 그 악몽 속에서 답답함이 극에 달하면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어느 순간에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게 된다구요. 눈이 탁 떠지는 거죠. 


그런데 시작은 그러한 해결책이 반드시 있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그런 간절함도 생기고 그럴 것 같아요. ‘그런 게 있을까?’ 이런 생각을 가지면 마음 자체가 단단해지지 않잖아요? 진짜 그게 확실하게 있다는 믿음이 있으면 찾으려고 할 텐데…

- (웃음) 100% 확실한 믿음은 오직 스스로 확인해봐야 생기는 겁니다. 이미 수천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했고, 여러 경전에도 그런 말이 있지만 그 어떤 사람, 어떤 경전도 나를 100% 믿게는 못 하더라, 나는 100% 믿어야 이 공부를 하겠다, 누가 진짜 그런 것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줘야 나는 공부하겠다… 이렇게 한다면 가능성은 없는 거죠. 왜냐하면 그렇게 해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그럼 뭐 인연이 닿아야지…

- 맞아요. 스스로가 마음이 동해서…


모든 만물에 마음이니, 불성이니, 신이니 하는 것이 존재한다고 하잖아요. 동물에게도 있다고 그러고… 모든 만물에 그것이 스며있는 건가요?

- 스며있는데, 그게 개개의 사물을 통해서 확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확인해 놓고 보면 그것 아닌 게 없는데 확인하기 전에는 과학적인 탐구처럼 관찰, 실험 이런 식으로 궁구하고 궁리해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밖을 봐서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네요. 나를, 내 안을 봐서…

- 내 안을 본다는 것도 사실은 정확하게 맞는 말이 아닙니다. 나를 본다는 것도 벌써 나를 대상화시켜 버렸거든요. 대상을 봐서는 안 되는 겁니다.
  요컨대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앞의 찻잔을 들어 보이며) ‘이 컵의 본성이 뭘까? 여기에 도가 있다고 그러는데…’ 이런 식으로 탐구를 하는데, 이 컵의 본성이 뭘까? 여기에 도가 있다고 그러는데…’ 하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이 일, 내가 지금 이렇게 하고 있는 이 일이 컵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냥 이 일이 어디서 일어나고 이 일이 뭔가를 알면 그것으로 되는 거예요. 그거거든요. 

   자기 존재에 대한 확인은 대상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존재에 대한 확인이란 것은 스스로 항상 존재하고 있다는 그 사실에서 자기의 존재가 확인될 뿐이죠. 따지고 보면 내가 존재하니까 이 컵도 있는 거거든요.  


제가 살아오면서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다 변하는데 가장 변하지 않는 게 뭔가 하고 생각해 보니까, 이 생생한 것, 이 의식, 살아있다는… 왜 나이가 들어서도 젊었을 때 감정 못지않게 사랑을 느끼고 이런 것들이 살아있다고 하잖아요? 그게 십분 이해가 되는 게 내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이것만 변하지 않는 건가? 그런 생각도 하게 되더라구요. 

- ‘그래 살아있다는 이것만 안 변하고 다른 것은 다 변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면 개념적으로 파악한 것입니다. 그러면 “살아있음”이 진짜로 뭐냐? 개념적으로 파악한 것이 아닌, 살아있다는 게 도대체 뭐냐 이것을 직접적으로 확인을 해봐야죠.  


그것을 확인해야지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겠네요?

- 그렇죠. 일거에 해결이 되죠. 문제 자체가 본래 없었던 겁니다. 


그러면 보통 지금 내가 살면서 힘들어하는 부분이 어떤데 거기에 대한 해결방법을 알려 달라 이런 이야기를 해봐도 소용이 없겠네요?

- 그것은 전부 증상에 따른 치료법이지, 근본적인 치료법은 아닙니다. 내 스스로가 뭔가 계속 마음에 물결을 일으키면서 상대방에게 이 물결을 좀 잠재울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바깥에서 불어오는 외부적인 바람이야 차단해 줄 수 있겠죠. 하지만 자기 스스로가 일으키는 물결은 스스로가…
그런데 스스로가 잠재워야 한다고 하는 것을 잘못하면 그야말로 좌선처럼 고요하게 가만히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수가 있는데 절대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의식이란 놈은 절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요. 의식은 물과 같거든요. 물은 외부에서 자극이 오면 반드시 거기에 따라서 움직입니다. 유동성이 물의 본성이죠.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외부의 자극 없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요. 흘러가는 물처럼 그렇게 여러 가지 인연을 만나면서 살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반드시 흔들리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고요히 앉아서 마음이 잠잠하게 가라앉기를 바라는 것은 증상에 따른 치료법이에요. 마치 물을 그릇 안에 담아서 뚜껑을 닫아 놓은 것과 같아요. 물이란 것은 본래 흐르는 게 본성인데…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방안에 처박아 놓고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만 있으라면 되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살 수는 없거든요. 물하고는 달리 사람은 가만히 있어도 (망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일어나는 그 자체가 본성이니까 일어나는 것을 붙잡아서 못 일어나게 하겠다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인 거예요. 


그러면 그것을 체험하신 분들도 (망상이) 일어나긴 일어날 거 아니에요.

- 다 일어나죠. 사람인데…  


그럼 어떤 차이가 있는 건가요? 특히나 즐거움보다 고통이나 난처한 상황이나 이럴 때…

- 그런데 그 차이는 말로써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어쨌든 (체험한 사람이나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나 다) 같이 (망상이) 일어나지만 안 일어난 것과 똑같아요. 일어나지만 일어나지 않은 것과 똑같다구요. 


괴롭지 않다는 그런 말인가요? 그런 것을 못 느낀다는 말인가요?

- 일어남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이 별로 나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하죠. 물이 마구 흔들리지만 그것이 어지럽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단 말이죠.  


느낌은 항상 고요한 상태인가 보죠?

- 그렇죠. 


항상…

- 항상 안정이 되어 있고 고요하죠. 마구 말을 하고 있어도 항상 고요하죠. 


죽음도 그럴까요? 죽음 앞에서도? 아니면 타인의 죽음이나…

- 그렇죠. 늘 담담하죠. 그 효과는 말로써 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죠. 그것은 맛보기 전에는 맛본 이후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아무리 이야기해도…. 


맛을 보면 좋으니까 파고들려는 게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좋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셔야지… (웃음)… 지금이 힘드니까…

- 이것을 모르는 상황에서 가지고 있던 그런 힘듦은 가벼워지죠. 그런 모든 힘듦이 가벼워져요. 


다른 것보다도 사람 앞에서 제일 약해지는 것 같아요. 타인을 항상 의식하면서 타인 중심으로 살아와서 그런지…

- 맞아요. 사물보다도 늘 사람이 나를 괴롭게 하죠. 사람에게 우리가 많이 흔들리죠. 사람으로 인한 흔들림이란 것은 워낙 뿌리가 깊기 때문에 이것을 체험한다고 해서 금방 그렇게 없어지는 것은 아니고 서서히 없어지지만 어쨌든 그것도 가벼워집니다. 내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받은 영향에서 훨씬 자유롭게 됩니다. 부담스럽지 않게 돼요. 


자유가 그립죠.

- 자유의 진정한 맛을 모르니까 우리는 좀더 멋지게 매달리려고 하지… (웃음)


맞아요. 그것(창작)도 내 궁금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방편이 되겠다 싶어서 했는데, 하는 동안은 잊어버릴 수가 있는데 끝내고 나오면 똑같은 문제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 고민이 있으면 일에 몰두하라고 하잖아요. 일에 몰두할 동안에는 잊어버리니까… 그런 것은 잊어버리는 거지 해결된 것은 아니에요. 그게 바로 대증요법이거든요. 어린아이들 주사 맞을 때 주사가 아프니까 엉덩이를 때리잖아요? 다른 데 신경을 쓰게 하면 주사의 아픔을 모르니까… 대개가 다 그런 식이라구요. 그런 것은 근원적인 해결책이 아니죠. 


(한숨을 쉬며) 그러면 하나밖에 없네요. 답답한 마음… 

- 그래서 자기 스스로가 그 갑갑한 마음, 간절한 마음을 안고 설법도 듣고, 평소에도 나름대로 고민도 하고 이런 상황에서 지나다 보면 서서히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변해갑니다. 마치 달걀에서 병아리가 부화하듯이 서서히 변해갑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탁 하고… 병아리가 되는 것은 일순간인데 그전에 오랫동안 서서히 변해 온 겁니다. 


선생님께서 아까 설법하시다가 어떤 비유를 들어 한 5분 “그겁니다.” “그겁니다.” 하시면서 말씀을 자꾸 반복하셨는데 그 순간 뭔가 찌릿 하는 게 있더라구요. 몸으로 느끼는 어떤 그런 것도, 내가 기존에 생각해 왔던 것과 다르니까 몸이 그런 것도 느끼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더라구요. 그런 것도 일종의 좋은 신호인가…

- 하여튼 공부란 것은 밖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남들이 볼 때는 공부를 하는지 안 하는지 몰라도 자기는 항상 그게 고민거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회생활 원만하게 하면서, 겉으로는 별로 안 드러내면서 자기는 이것이 고민거리여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지 안 그러면 공부한다는 핑계로 사회생활 제대로 못합니다. 


신경을 써야 하는데, 사회생활을 하다보니까 잊어버려요. 그런 의문을 좀 잡고 있으려고 해도 순식간에 휩쓸려서 잊어버리게 돼요. 

- 잡고 있다기보다도 스스로 고민이 되면 잊혀지지가 않죠. 그런 상황이 되어야 해요. 의식적으로 붙잡고 있는 것은 공부라고 하기엔… 


선생님께서는 항상 똑같은 이야기, 한 가지만 말씀을 하시는 거잖아요. 그런 것도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나 보죠?

- 그렇죠. 이야기를 들어서 말귀를 알아듣는 게 아니죠. 일종의 눈치를 주는 거죠. 그러면 자기 스스로가 조금씩 변화가 되는 거죠. 말귀를 알아듣는 거야 몇 번 들으면 알 수 있죠. 사람이 변한다는 게 결코 쉽지 않습니다. 잘 안 변해요. 말은 금방 이해하는데 그 사람 자신은 말 따라 그렇게 변하지 않거든요. 


그런 점은 있더라구요. 처음에 모를 때는 막 끄달려 살다가, 꿈같은 거다, 이 현실이, 내가 보기엔 생생한 것 같은데, 꿈같은 거다, 실재가 아니다 하니까 어떻게 보면 생활하는 게 편해지는 그런 것도 있어요. 이 모든 게 사람의 의식이 만들어 내는 것이란 말을 듣고 난 후하고 그 전하고… 

- 그렇게 해서 편해지는 그것 자체가 사실은 의식의 장난인데… 


그렇죠. 그것도 의식으로 의식을 제압하는 건데… 그래도 편해지더라구요.

- 그렇죠. 그렇게만 하더라도 조금은 편해지죠. 하지만 그것 같고는 안 되는 거죠. 대개 마음공부라고 하면 그 정도 수준에서 사람들을 만족시켜 주고 말거든요. 그래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뭔가 좋은 점이 있을 거라고 바라서 이 공부를 해도 안 되겠군요?

- 뭘 기대를 해서도 안 되고, 자기가 그냥 여기에 아무 조건 없이 목말라 해야 되는 겁니다.


처음엔 내가 나를 괴롭히고, 사람 만나면 힘들고, 이런 것을 좀 해소하는 방법이 뭔가를 묻고 싶었는데 부끄러워서 못 물어 보겠네요. 그게 아닐 거라는 것도 알았는데…

- 대증요법은 아닙니다. 그런 대증요법이야 일반적인 상담프로그램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대답해 주는 거죠.     


오로지 그 진리가 뭔가 그것 하나를 갖고…

- 그냥 아무런 조건 없이 목말라 해야되지 어떤 조건을 달고 하면 반드시 그쪽으로, 잘못된 방향 쪽으로 가게 됩니다.


진리가 뭔가 이것 하나… 진짜 이것 하나밖에 없습니까?

- (웃음) 이것 하나만 알면 다 해결됩니다. 내 존재는 단일한 것이지 복합적인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너무나 복잡한 것 속에서 살아서 그런지 단순한 것은 의심스럽거든요?

- (웃음) 그게 우리의 병이죠. 도덕경에도 보면 공부는 손지우손(損之又損), 자꾸자꾸 덜어내서 텅 비워버리는 거다, 아무것도 없는 거다, 가장 단순하게 되는 거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본래 단순한 하나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하나뿐입니다.
   그러니까 공부는 관심을 가지고 자꾸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깊이 빠져 들 수도 있고, 그런데 그것을 억지로 할 수는 없고, 또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하게 되면 결국엔 그 의도 쪽으로 가게 되어 있거든요. 그래서는 공부는 안 되는 거고, 그냥 아무 조건 없이 “이것이 내 인생의 숙제다.” 이렇게 생각하는 그것밖에는 달리 없어요.